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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도 뛴다"는 말이 있다. 철학을 한다는 모모의 서양 사람들이 무아(無我)를 들고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과연 게 맛(?) 정도는 알고 그리 말하는지 안쓰러운 감이 든다. 無我의 삶이란, 최소한 있는 듯, 없는 듯한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 무아(無我)를 주장하려면, 당연히 무아답게 삶의 모양이 소박해야 하고, 무아답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소유욕에 찌들고, 죽음의 공포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것은 위선(僞善)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무아'의 가정(假定)에서 실존(實存)이니, 진아(眞我)를 논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일은 없다. 그렇다고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엉거주춤 살라는 말은 아니다. 관리하면서 사는 삶이 아름답다. 자연무위(自然無爲)를 그저 ..
'해탈(解脫)'이란, 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란 설명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는 자가 있다. 그러므로 알아차리는 자가 없는 해탈은 무의미하다. '열반(涅槃)'은 해탈과는 다른 말이다. 열반은 죽음, 에너지의 불이 꺼진 상태, 원인이 무효가 된 상태 원래의 상태(無)로 돌아간 상태, 알아차리는 자 역시 사라져 버린 상태이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해탈인가 열반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선택이다. 선도(仙道)가 바라는 것은 해탈이다. 선도는 모든 일이 중심에 ‘내’가 있다. 선도는 무아(無我)를 말하지 않는다. 선도는 누군가를 신앙(信仰)하지도 않는다.
말처럼 허망한 것도 없습니다. 말로는 떡을 해서 천하 사람을 다 먹일 수 있습니다. 말로는 "내가 없다"고 할 수 있으며, 그리 믿으며 살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내가 없다고 느끼거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탓하기는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그리하겠습니까?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합니다. 무아(無我)의 주장은 실제로 자기가 없어진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나는 그런 사람을 칠십 평생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그리 말했다고 맥없이 따라 해선 곤란합니다. 그 논리(論理)는 허구(虛構)입니다. 마치 마약(痲藥)과 같습니다. 어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지구에 발붙이고 사는 한 말입니다. 정말 내가 없다면, 무슨 짓을 해도 ..
불교와 인연이 있는 사람, 공부를 좀 했다는 사람일수록... 자기를 부정한다. '자아(自我)'를 죽여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비판(批判) 없이 그것을 따르는 많은 사람이 있다. 나는 자기를 '없다'고 하고 부정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석가의 삼법인(三法印) 중 제법무아(諸法無我), 즉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교리(敎理)에 근거한다. 과연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는 연기(緣起)하는 것이 맞고, 다분히 의타기성(依他起性)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론상(理論上)으로는 반박할 여지가 없는듯해 보인다. 그렇다면 '에고(자아)'를 죽여야 하고, 무아(無我) 교리를 따라,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무념무상(無常)을 체험..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첫째는 "나는 없다"는 전제(前提)를 놓고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는 찾을 그 대상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또 그렇게 믿어야 한다. 뭘 좀 안다는 사람들은 앵무새처럼, "때리는 자도, 맞은 자도 없는데, 아픔만 있다." 즉, '내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웃기게도 그 말에 생각 없는 많은 사람이 동조한다. 한마디로 바보 게임, 벌거벗은 임금님 놀이이다. 조작된 교리(敎理)에 속지 말라. 뇌를 혼란에 빠뜨리지 말라. 여기 엄연히 이렇게 내가 존재하지 않는가? 물론 이 몸과 마음을 '나'라고 할 수는 없다. 쉼 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주시(注視)에 마음을 쓰면, 쉼 없이 변하는 그것(사물)들을 쉼 없이 알아채고 있는 '..
태어나는 순간, 생존 의식 외에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오직 생존을 위해 더 유리한 것만을 구하도록 조정되어 있다. 생각과 행동 역시 그것에 의해 우선순위가 정해진다. 젖을 빠는 것으로 시작되어 그 일은 평생동안 지속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무엇이 지금의 나에게 더 유리한가에 기초하여 그에 준한 말과 행동들이 나오게 되어 있다. 신앙이란 것도 별것이 아니다. 신앙 행태를 보라. 겉으로는 사랑과 자비를 외칠지 몰라도, 그 뒤를 보면 이기주의와 반목, 폭력이 난무한다. 극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믿음이 다소 제 자리를 찾기도 하지만, 절대다수의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인지, 진리인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나는 무엇을 믿는가? 나는..
"깨달음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선사(禪師)는 "이것뿐"이라는 답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고(苦)로 점철된 일상생활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하다는 뜻은 모든 것이 "헛것"이라고 부언하였고, 그것을 이해하므로 모든 고통을 넘어선다(度一切苦厄)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空이란 말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헛것" 내지는 "텅 빈 것"으로 이해하면 삶이 허망(虛妄)해집니다. 空이 비어있는 것으로 보여도 에너지(氣)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의 조화에 의해 세상과 그 안에 속한 모든 것들을 일어나고 꺼집니다. "어떤 法도 세우지 마라. 오직 中道"를 설파하던 인사(人師)도 배고픈 것 못 참고, 독감 걸리면 "아이구, 죽겠다" 합니다. 탁상공론(卓上空論)은 관념(觀..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겠습니다. 그것이 큰 파급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2500년 전 시타르타의 "무아(無我)"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매우 시끄럽습니다. 그의 "연기(緣起)"라는 존재관(存在觀)에서 비롯하여 본래면목(本來面目)도 사실은 실재(實在)가 아니라는 주장이 생겨났습니다. "연생(緣生)은 무생(無生)"이라는 논리(論理)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고, 들리면, 일단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은 또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무아(無我)는 유아(唯我), 즉 진아(眞我)의 반증이 아닐까요? 죄 있다고 결론을 먼저 내리고 추궁하다 보면, 결국은 무죄(無罪)도 유죄(有罪)가 되고 마는 것이 세상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가설은 가설일 뿐입니다. ..
"나라는 것은 없다"를 주장하는 초기불교 사람들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처음엔 조사선(祖師禪), 간화선(看話禪)을 비웃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하더니, 결국 알아채는 '그놈' 역시 연기작용(緣起作用)이니 '나는 없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론이 맞다면,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는 '그놈'은 누구인지요? 얻어들은 '무아(無我)'라는 문자에 너무 매인 것은 아닌가요? 그것 역시 말일 뿐인데 말입니다. 움직일 수 없는 눈앞의 사실을 아니라고 열심히 설명해 보려는 대표격 노인의 우왕좌왕하는 말투가 너무나 옹색해 보였습니다. 시타르타의 無我는 五蘊(色受想行識)의 당체가 비어(空)있다는 말입니다. 그 밀을 문자대로 "없다"라 해석하는 것은 空이란 말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해가 아닐까..
벌판 끝 앞산이 제일 높은 山인 줄로만 알았던 때가 있었다. 아무도 그 산에 오르려는 아이는 없었고, 형들은 그 산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 했지만, 믿지 않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우리는 봄바람을 불어오는 산 너머에 누가 사는지 늘 궁금했다. 하루는 행방불명되었던 바보 '석두'가 산 너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앞산 뒤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긴 강이 있었고, 강을 건너면 앞산보다 훨씬 더 높은 산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후 석두 친구들이 용기를 내어 석두처럼 앞산 정상에 올랐는데, 석두 말처럼 눈앞에서 높은 산들을 보았다. "견성(見性)이 구경열반(究竟涅槃)이며,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