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신선의 삶이 시작된다 본문

선도와 요가

신선의 삶이 시작된다

알아챔 2023. 5. 10. 01:17

선도(仙道)는 '깨달음(見性)'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단전(丹田)만을 지키라(意守丹田)'고 한다.

선도는 '지관(止觀)'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과정들이 止(사마타)로 시작해 觀(위빠사나)으로 끝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몰입(沒入)을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단전에 마음을 두는 것만으로 힘쓰지 않고 내면세계에 몰입(三昧)한다.

특별한 자세(정좌)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기를 일으켜 몸을 다스리는(調身) 일련의 동작들이 있으며, 숨을 조율하는 법(調息)이 있고, 기의 흐름을 관조하는 것으로 마음이 안정(調心)을 찾는다.
사실상 그것들 모두는 한통속으로, 우리를 해맑고 고요한 자리(空寂)로 인도한다.

선도는 세인(世人)들에게 건강 장수법 내지는 신통력 개발법으로 알려졌지만, 그것은 궁극의 목표(本意)가 아니다.

목표는 자명하다.
누구라 할지라도 밝은 선생의 지도로 공부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本性)를 향해 가게 된다.

선도에서 몸을 연단하고(鍊精), 기에 집중하고(鍊氣), 마음에 몰입(鍊神)하는 과정 모두가 하나같이 우리를 본래의 자리로 이동(還虛)시키는 방편이다.

인생을 어느 방향으로 오르더라도 결국은 정상을 밟게 되는 등산에 비유한다.
각자의 취향이 다르고, 시간이 좀 더 걸리고, 덜 걸리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우리는 왕왕 같은 것(不二)을 다르게 말하고 있다. 선도에서 에너지를 깨우고(得氣), 기운을 모으고(蓄氣), 기를 운행하는 (運氣) 과정들은 알고 보면 싯다르타의 사념처(四念處)와 거의 흡사하다.

기(氣)의 흐름을 주시하다 보면, 육안(肉眼)이나 관념(觀念)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근원적 체험을 한다. 애쓰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눈(心眼)이 밝아지는데, 그것을 개안(開眼)이라 한다.

나는 그것이 '누진(漏盡)'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는다.
축기가 되면 될수록 점점 더 밝아지기 때문이다. (선도는 "氣의 새어나감이 다하였다"로 漏盡을 해석한다)

선도는 새삼스럽게 '돈오돈수(頓悟頓修)'를 말하지 않는다. 본성(本性)자리는 늘 여여(如如)하여 오래 걸려 닦을 필요가 없는 말쑥한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선도는 점수(漸修)에 힘쓴다.
공부가 에너지(氣)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단전을 중심으로 축기를 하고, 운기를 하는 유위법을 쓴다.

그리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무위로 전환된다.
대상을 향하던 시선이 나도 모르게 주체(본성)를 향하게 되는데, 그것이 밝음을 얻는 메커니즘이다.

그것은 어렵지 않다.
자각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누구에게나 이미 준비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약간의 밝고 어둠의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선도는 깨달음을 말하지 않는다.
힘을 빼고 천천히 움직여 몸을 다스리고, 숨과 의식을 일체화(의수단전)하라고만 가르친다.

그것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건강의 회복과 더불어 당체(本來面目)를 알아채게 한다. 이른바 애씀이 없는(無爲) 건강과 자각이며, 그것이 성명쌍수(性命双修)이다.

그 이후부턴 사물을 보는 관점이 변한다.
마음의 중심이 잡히고, 나를 끄달리게 했었던 온갖 것들로부터 해방된다.

쉽게 마음이 고요해지고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감정이 저절로 일어나는데, 그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심(布施)으로 나타나게 된다.

견문각지(見聞覺知) 하나하나가 나와 둘이 아님을 깨달으며 살게 되는데 ...

신선(神仙)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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