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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석가가 선정(禪定) 스승 휘하로 입문했던 이유는 집(集: attachment)을 내려놓는 확실한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集이 고통(suffering)을 가져온다는 것이 그가 사유한 결론이다. 결국 통찰 명상(Vipasana)을 창시하였는데, 이유는 집중 명상(Samatha)에 비해 깨어있기에 더 효과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생활에서 언제나 그 상태(Samadhi)를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늘 마음 챙김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것 역시 유명무실할 수밖에 없다. 선도(仙道)는 의수단전(意守丹田)을 통해 입정(入靜)한다. 그것이 타 수행법과의 차이이다. 丹田이 활성화되면 Anytime 깨어있음이 저절로(無爲) 일어난다. 특징은 에너지(氣)를 느끼며 수련한다는 것이다.
단전(丹田)이 열리면, 에너지(氣)의 본원(本源)과 계합(契合)된다는 것 외에도 생각을 좌지우지하는 능력이 살아납니다. 수행자의 가장 큰 고민은 제어 안 되는 잡념(妄想)입니다. 그것이 바로 공부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원흉입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丹田은 꼭 회복시켜야 합니다. 잡념 제어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하려면 제일의 관심사가 바뀌어야 합니다. 마음이 엉뚱한 곳에 가 있는데, 단전이 열릴 리가 없습니다. 丹田에 제일의 비중을 두어 공부한다면 반년이면 가능한 것이 단전활성화입니다. 물론 공력(功力)을 가진 바른 스승의 도움이 필요하겠지요.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에너지는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축기(蓄氣)를 하는 수행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에너지(氣)는 배신하지 않는다"이다. 바르지 않은 축기법과 게으름이 문제일뿐... 기차는 연착할 수 있다. 하지만 기차는 온다. 단전 깨어남도 다소 늦어질 수 있다. 오직 열겠다는 마음 하나를 유지한다면 단전은 열리고 만다. 연착은 있어도, 기차는 도착하듯이...
무언가를 담으려면 넉넉한 크기의 용기(容器)가 필요하고, 누진(漏盡), 즉 밑이 빠져있지 말아야 합니다. 선도(仙道)의 기운을 얻는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전(丹田)은 기운(氣運)을 담는 그릇입니다. 우리가 외단공(外丹功)과 내단술(內丹術)을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깨어있는 삶을 위해서는 먼저 단전이 깨어나야 합니다. 단전이 열리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자성(自性)으로 인도합니다. 먼저 自性을 깨우치고 소주천(小周天)을 할 수도 있고, 먼저 운기(運氣)의 묘(妙)를 알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우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성(性)과 명(命)이 동시에 닦여야 합니다. 그것을 성명쌍수(性命双修)라고 합니다.
선도는 단전(丹田)으로 시작해 단전으로 끝난다. 단전이 열리면 피부를 통해 기운을 거둬들일 수 있게 되고, 그 기운을 각 기맥(氣脈)에 보낼 수 있게 된다. 단전이 열리면 단전호흡을 통해 안정적인 선정(禪定)을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날마다 좋은 날이 된다.
단전(丹田)이 늘 활성화되어 있으며, 그것을 느끼며 살려는 사람에겐 소식(小食)을 권한다. 배불리 먹으면 몸 안의 에너지가 우선 그쪽으로 밀려가기 때문이다. 술은 주량의 1/3만으로 만족하고, 담배는 피우지 않는 것이 좋다. 술, 담배는 내가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것들이 나를 즐기게 해서는 안 된다. 수련을 하면서도 아직 술, 담배, 과식에 의존하고 사는 사람은 아직 마음속 정리가 덜 된 사람이다. 단전이 열렸다는 것은 깨달음과도 가까워졌다는 것이며, 그것이 온전히 활성화되면 밝음(見性)도 부족함 없이 찾아온다. 깨달음이란 사물을 안팎으로 정확히 보는 것이다. 하지만 밝음이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 가운데도 시야의 대부분을 외부로 향하고 사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마음을 내부로 돌리는 데 인색하다. 그것..
자기가 자기를 누군지 모르고 산다면 그것을 살아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일체(一切)가 허망(虛妄)하다느니,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고(如夢幻泡影) 하는 것이다. 아직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깨달음 길에 나서며, 대부분은 벌어지는 일에 속아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살고 있다. 그들은 자성(自性)에 대해선 관심조차 없다. 그들은 소유와 권력, 그리고 Sex만이 인생의 모든 것이라 알고 있다. 조금만 생각을 조율해 본다면 외로움, 우울함,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말이다. 모든 괴로움(苦)은 자기 정체성의 부재로부터 온다. 하루 10분 만이라도 외부로 향하는 마음을 내부로 돌려보자. 보고 들리는 것들과 느낌만을 따라가기보다 그리하는 본체(本體)에 에너지를 써보자. 숨을 고요히 지켜..
단전이 엔진(engine)이다. 엔진 출력이 좋아야 안정적으로 차가 움직이듯이, 선도(仙道) 수련도 단전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혹시 단전이 깨어났다 할지라도 활성화되지 않으면 시동이 꺼진 차를 움직이려 하는 것과 같다.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외단공과 내단공이 5:5의 콤비네이션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되어야 축기(蓄氣)가 가능해지고, 운기(運氣) 역시 원활해지게 된다. 혼자의 노력만으로 단계를 향상하기는 쉽지 않으며, 그것을 위해서는 스승이나 수련 동기들의 적극적 후원이 필요하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되기 위해선 상호 간의 사상적 코드와 에너지의 동조(同調)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믿음을 강조했으며,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고 한 것이다.
깨달음을 일별(一瞥)하였다 할지라도 신뢰하는 스승에게 귀의(歸依)가 없는 한, 그야말로 일별에 그치고 만다. 그것은 거의 모든 각성자(覺醒者)들의 공통적 의견이다. 여기서의 스승은 물론 살아있는 선지식(善知識)만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살아 숨 쉬지 않는 경전(經典)이나 어록(語錄), 그리고 매체(媒體)는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진여자성(眞如自性)을 작용시키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물론 움직이기 어려운 귀한 인연(因緣)을 타고난 수행자에게는 예외이지만 말이다. 그것은 소주천(小周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의념주천(意念周天)이라면 모를까, 단전(丹田)이 깨어나고 여실(如實)한 기운에 의해 주도되는 소주천이라면 꼭 이미 주천을 이룬 스승의 도움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분명히 깨달음의 인..
나에게 "너는 어찌하여 선도(仙道)를 선택하였는가?" 묻는다면 운명적이라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그것은 마치 이과(理科)의 사람에게, "당신은 어찌하여 골치 아픈 수학을 재미있어하는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수행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바로 자성(自性)을 깨우치려 시도하는 공부법이고, 다른 하나는 일단 에너지(氣) 공부를 통해 본래면목(本來面目)과 계합(契合)하는 공부다. 자아(自我) 탐구하는 법도 여러 가지가 있으며, 에너지(氣) 수련법도 그 갈래가 수없이 많아, 문파별로 자기들이 하는 수행법이 으뜸이라고 하지만, 문외한이 볼 때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렇다면 세상엔 왜 수많은 수행법이 있는가? 그것은 각기 다른 많은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Man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