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和光同塵 (515)
谷神不死
세상엔 세 부류의 사람이 산다. 상사는 도(道)를 들으면 힘써 행하고, 중사는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하고, 하사는 도를 들으면 비웃는다. 반신반의하거나 비웃음이 없는 도는 도가 아니다. 노자(老子)의 말이다. 1. 돈과 권력, 명예를 좇으며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세상 사람의 99%를 차지하는 평범한 사람, 이른바 하사(下士)다. 2. 무상( 無常)함을 깨우쳐 삶의 일체가 고통임을 알아채 세상과 유리된 삶을 사는 수행자를 자처하는 사람. 무아(無我)까지 깨우쳐 윤회를 넘어 이번 생을 마치면 다시는 세상에 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염세적(厭世的)인 1%의 사람이 있다. 혹시 그런 사람이라면 중사(中士)다. 3. 희귀하기는 해도, 도(道)를 좇지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 도와 합일한 사람, 1%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은 누구나 남들로부터 배려를 받으며 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기를 우선 배려하는 사람을 가리켜 '에고이스트'라고 부른다. 하지만 남들로부터 배려를 받을 때, 과연 나는 그럴만한 사람인가, 그리고 나는 남을 우선 배려하며 살고 있는지를 자기(ego)에게 자주 물어야 한다. 자기는 미뤄두고, 진정 상대 우선으로 사는 대의(大義)를 우선시하며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대인(君子)'이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어쭙잖게 대인(大人)인 척하는 그것이 자기가 소인배라는 것을 탄로 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대인 소리를 들으려면, 우선 에고(ego)가 무엇인지부터 알고 있어야 한다. 에고가 무언지를 모르는 사람은 결코 대인이 될 수 없다. 나는 에고이스트(egoist)로 살아보라 권한다. 그 말은 남을 ..
'무아(無我)'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나'에 대하여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순서다. 자기를 아는 사람을 가리켜 지성인(知性人)이라 한다. '나'는 정기신(精氣神), 즉 육체와 에너지(氣) 그리고 정신(의식)으로 구성된 종합체이며, 쉼 없이 변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니며, 오늘의 나도, 내일의 나도 나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없다. 무상(無常)하기 때문이다. 나를 대표할 만한 것은 '의식(意識)'이다. 어떤 의식을 가졌느냐가 나의 가치이며, 그것이 우리가 공부해야 하고, 깨우침을 얻어야 할 이유다. 의식은 공부량에 따라 진보하며 영원한 존재다. 그것은 육체가 흩어져도 에너지가 끊겨도 없어지지 않는다. 살아서 몸과 에너지를 어떻게 관리했느냐에 따라 사후의 나는 다른 존재가 되..
체질을 바꿔라. 너무 둔감한 사람, 감정이 메마른 사람, 의심이 많은 사람, 부정적이고 패배 의식이 강한 사람은 깨달음도, 소주천도 어렵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고, 자주 자연을 접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정(情)을 나누고, 호흡 명상과 함께 기공(氣功)을 배워라. 더 큰 진보를 원한다면 태극권을 배워라. 싸우는 태극권 말고, 氣를 살아나게 하고 통기를 시켜주는 태극권이어야 한다. 선도연맹은 양가의 적통 태극권을 가르친다.
깨달음이란 즉시 알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돈오(頓悟)'라고 합니다. 깨달음은 단지 '내가 누군지를 아는 것'입니다. 교리(敎理)가 아니며, 배우거나 믿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깨달음은 멀어집니다. 학문으로 덮으려 하기 때문에 내가 점점 괴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다리를 틀고 앉을 필요도 없고, 가족을 버리고 산속으로 숨을 필요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 것이 바로 '나'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무아(無我)도 아니고, 참나(眞我)도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고 무아(無我)니, 진아(眞我)니, 따지는 것부터 깨닫기 싫은 핑계입니다. 깨달음을 어렵다고 하는 이유는 자기를 아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으며, 만났다..
세상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과, 의심으로 구원받는 사람,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필자는 이중인격자이다. 그는 믿음과 의심을 반반씩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온전한 신앙인이 되지 못했고, 시한부 종말론을 거부했다. 신앙인에게 의심은 금물이다. 신앙인에게 교리를 따지지 말라. 그들에겐 절대적 믿음, "믿습니다, 아멘"만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동기부여는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동기부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요한의 침례 의식 중, 요단강 위에 나타난 비둘기 모양의 성령을 통해 자신이 사람의 자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임을 확인했다. 열려있다고 알려진 김기석 목사를 만나, "어떻게 하면 믿음을 키울 수 있습니..
Sex 문제에 대해선 특히 호박씨 까지 말고 담백한 것이 좋다. 물론 혼인한 사람과의 연애는 목숨을 걸어야 하지만 말이다.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자연현상이다. 겉으로 점잖은 척, 아닌 척하는 사람의 뒤를 캐보면 무엇이 나올까? 모르긴 몰라도 가관이 아닐 것이다. 특히 종교계에 종사하는 신부, 목사, 승려들 사이에 벌어지는 외도 사건으로 심심치가 않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종족인 것이다. 문선명이나 정명석, 이만희나 증산파처럼 대놓고 하는 사람은 그렇다 치고, 조용기의 나비 부인, 총무원장 자승의 축첩 등 숨겨진 말로 하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 많다. 황진이는 수많은 잘났다는 남자를 희롱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인이다. 그녀에게 걸려들면 누구라도 위선의 가면이 벗겨졌다. "창산리 벽계수..
의수단전(意守丹田)을 하면 일석이조 삼조가 된다. 우선 피로가 풀리고, 스트레스(불안)가 사라지고, 단전이 살아날 것이며, 축기가 될 것이고, 소주천이 눈앞일 것이고, 내가 단전을 생각하니 거기 나도 있고, 단전도 있게 되고, 내가 누군지도 알게 되고, 단전에 기운 모이는 것도 알게 된다.
살아있는 사람의 관심사는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이다. 별 관심 없이 사는 사람이 더 많지만 말이다. 그 둘이 모든 불안(不安)의 시작이다. 불안의 중심은 죽음이며, 그것이 고통을 부르는 제1원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수행이다. 신앙처럼 편한 것은 없다. 그것이 신앙이 세상에 만연하는 이유다. 어렵게 따지지 말고, 그냥 믿어버리면 만사 오케이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盲信)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깨우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수행(修行)이라 한다. 세상에 종교라 불리는 많은 신앙이 있는데, 용도는 단지 불안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그것에 안주하면 임시적이지만 평안을 얻는다. 기독교는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
우리는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 아닐까? 세상엔 '내가 세상을 운전하며 살겠다'는 사람과, '운전되는 차를 타고 구경만 한다'고 생각하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자기가 운전한다는 사람은 늘 스트레스에 시달릴 것이고, 운전되는 차를 타고 있다는 사람은 경치를 즐기며 안락한 삶을 살 것이다. 물론 대다수가 전자이고, 소수의 후자가 있다.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 아닐까? 잠시 후 우리는 자동으로 운전되는 자동차를 타게 될 것이다. 그 자동차에 탄 사람이 할 일은 거의 없다. 단지 출발 전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기만 하면 된다. 차 안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운전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팔정도(八正道)"라는 바람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