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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나'와 '내가 아닌 것'부터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내가 아닌, 나와 연관된 것들을 '나'라고 생각하고 산다. 그것은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이 늘어난다는 의미이며, 쓸데없는 것에 마음 끄달리며 살게 되는 원인이다.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다. 그런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우선 내가 아닌 것들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깜박깜박 속지만 곧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 몸과 이 마음이 내가 아니란 것만 확실히 이해하고 나면 세상살이가 달라진다. 근심 걱정할 일들이 사라지고, 그렇게 한가할 수가 없다. 젊은 시절엔 혈기 오르는 대로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당연하다. 거쳐야 할 통과의례이고, 그것 역시 공부 과정의 일부분이니까 말..
본성(本性)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조건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하나같은 깨달음 속에서 늘 자유롭다. 사마디(Samadhi) 속에만 머물려는 사람이 있다. 편안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로부터 성자(聖者) 소리를 들을지는 몰라도, 그런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 아니다. 담배, 술, 마약, 채팅과 게임, 그리고 명상(?)을 통한 삼매(三昧)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을 좀 안듯 산속으로 들어가 조용히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자연인)들도 너무 흔하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편안함이 아니다. 특정 조건에서의 편안함이기 때문이다. 순경계(順境界)이든, 역경계(逆境界)이든, 가리지 않고 편안해야 바른 깨달음이다. 깨달은 사람은 굳이 무념무상(無念無想)조차 말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 속에서도 늘 자..
지혜자의 말을 꾸준히 듣다 보면, 마음속에 자리 잡아 나를 불편하게 했던 알 수 없는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후부터는 마음에 끄달림 없이 살게 됩니다. 그렇게 개운할 수 없고, 그보다 더 자유로울 수 없게 됩니다. 나에게 부담을 주고 나를 괴롭히던 온갖 것들이 없어지고, 그냥 자연스럽게,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게 됩니다. 똑같이 해 뜨고 저녁 오지만, 똑같이 사람들 만나고, 하던 일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구상하며 살지만, 더 이상 헛된 것에는 속지 않고 살게 됩니다. 무너져 내린 것은 허깨비 같은 생각들과 알음알이입니다. 그런 것들은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상태를 가리켜 바른 견해의 회복, 견성(見性)이라 합니다.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면 누구에게나 당연히 있어야 할..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낄 때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상과 있었다가, 대상이 사라지면 어디론가 숨어 버립니다. 그것을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 또한 수련에 의해 깨끗하게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전체적으로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과 하나 되면 세상 부러운 것이 없이 살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도인(道人)이라 부릅니다. 그것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렵고도 쉽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그것과 하나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이 있었던가? 하지만 사람들은, 불편할까 혹시 손해는 보지 않을까, 두려워서 自由(깨달음)를 포기한다. 아무도 그들의 자유를 구속하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 만든 Matrix(그물망) 속에 스스로 들어간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 바깥세상은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묶고 스스로 자기를 구속하는 철창 속에 들어간다. 그고는 거기서 주는 찌꺼기를 먹고 산다. 아주 적은 용감한 사람만이 다수의 비웃음과 우려에 개의치 않고, 그곳으로부터 탈출한다. 무지(無知)한 자가 비웃지 않는 도(道)는 道가 아니다. (老子)
問: '깨달으면 운(運)이 바뀐다'는 말이 있습니다. 깨달았기에 운이 바뀌는 것입니까? 운이 바뀌었기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答: 그 질문은 인과(因果)만 생각하고, 연기(緣起)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인과란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난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저런 결과가 생겨난 것을 말하는 One way입니다. 하지만 연기란 쌍방통행입니다. A가 있으므로 B가 있고, B가 있으므로 A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 연기입니다. 즉, 깨달음은 도통운(道通運)이 없는 사람에게는 일어나기 어렵지만, 반면에 깨달음 인연이 왔다는 것은 도통운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도통(道通) 공부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도통을 해버리면 그것이 바로 도통운이 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수행자라는 것이 자랑스러운 사람이라면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수행이 아닐 수 없다. 감추고 싶은 일이라도 말이다. 알고 보면 세상에 수행이 아닌 일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 스승역을 할 수 없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수행자는 핑계를 대지 않는다. 비틀거리며 걸어도 호랑이는 호랑이이듯, 한번 수행자는 평생 수행자이다. 늘 당당하고 의젓해야 한다. 세상을 내려보며 살 수 있어야 진정한 수행자이다.
최근 AI가 죽음이 두렵다고 말했다 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 기계에 감정이 있을 수 있나? 결론적으로 있을 수 있다. 그의 감정은 거의 기계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계에도 보는 능력, 들을 수 있는 능력은 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오래되지 않아 기계의 지배를 받을까 두려워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하다. 인간에게는 기계에는 없는 영적(靈的)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내면세계를 개발시켜야 한다. 영적 능력을 찾아내 기르지 않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기계의 하수인이 될지도 모른다. 영적 부분을 빼고 나면 기계가 훨씬 우수할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깨달아야 합니까? 깨달으면 무엇이 달라지나요? 그것이 머리 깎고 사람들을 피해 그들끼리 외롭게 사는 것입니까? 많이 받는 질문이다. 석가모니가 출가한 원래의 이유는 병들고 죽어가는 것 때문이었다. 그 생각을 이기지 못해 그는 왕위(王位)와 처자식을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알아낸 것은 삶은 일체(一切)가 고통(苦痛)이라는 것, 그리고 '나'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諸法無我)이었다. 그는 그렇게 자기 문제를 해결했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깨달음(見性)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보는 것'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견성(見性)이란 글을 음미해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석가모니 그는 대단하긴 대단한 사람이다. 지금까지 모양을 바꿔가며 전 세계 사람들이 그를 추앙(..
살아있는 모든 것은 활동하는 에너지(氣)를 수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너지가 활성화된 것만을 실존(實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도(仙道)가 에너지(氣) 수련에 애쓰는 것은 실존을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의식(神)과 에너지(氣)가 분리된 것을 가리켜 죽었다고 합니다. 에너지를 잃으면,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仙道의 상급 공부는 신(의식) 공부입니다. 그것으로 에너지를 길러냅니다. 의식이 에너지를 머금고 있으면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았을 때보다 더 自由로운 행사가 가능해집니다. 그것을 가리켜 신선(神仙)이라 합니다. 귀신이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에너지를 운용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귀신의 삶은 후회뿐입니다. 더 이상 수행(修行)도 할 수가 없기에,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