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생각 (31)
谷神不死
심는 대로 거둡니다.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이 납니다. 생각이 말을 만들고, 행동을 유발합니다. 그리고 행동에 따라 결과가 나옵니다. 늘 자기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시(注視)하십시오. 그것이 행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자리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그것이 깨달음을 얻는 지름길입니다. 바로 그 자리가 만사(萬事)를 일으키고 꺼지게 하는 자리입니다.
사람은 자기 생각(性向)만큼 살기 마련이며, 그것을 넘겨 살거나 모자라면 불편을 느낀다. 사람 생각이 모두 한통속일 수는 없다. 인생은 종합예술이므로, 종일토록 다른 생각들이 흘러오고 흘러가지만,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어떤 류(類)의 사람인가를 알려면 하루 중 무슨 생각을 가장 많이 하고 사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돈의 사람은 거의 모든 시간들을 돈 생각에 소비하고, 권력이 꿈인 사람은 권력 생각에, 의료나 학문의 사람, 예능(藝能)이나 무도(武道)의 사람도 생각의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많은 시간을 사랑 생각에 빠져 지내면 로맨티스트라고 보면 되고, 도둑질과 폭력 생각으로 하루를 다 보내는 못된 놈, 신(神)과 진리(眞理)의 생각에 전 시간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자기의 ..
요즘 하느님(JMS)의 출현으로 새삼스레 세상이 떠들썩하다. '신앙(信仰)'은 시작부터 불합리한 구조이다. 그러므로 거기서 '합리(合理)'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개가 사람처럼 두 발로 걷는 것과 같다. 개는 네 발로 걸어야 편하다. 신앙은 그냥 신앙하면 된다. 신앙(信仰)은 종교가 아니다. 신앙이란 단지 몸 바쳐 믿어(信) 우러르기(仰)만 하면 된다. 그 앞에 '신학(神學)'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그것엔 논리(論理)도, 이치(理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좀 바람직하진 않아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믿으면 된다.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은 신앙이 아니니 말이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이 납니다. 생각이 말을 만들고, 행동을 유발합니다. 그리고 행동에 따라 결과가 나옵니다. 늘 자기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시(注視)하십시오. 그것이 행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자리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그것이 깨달음을 얻는 지름길입니다. 바로 그 자리가 만사(萬事)를 일으키고, 꺼지게 하는 자리입니다.
생각을 의도적으로 없애려 하지 말라. 없애려는 그것도 생각이다. 생각은 강물과 같다. 흐르는 대로 두고, 필요한 만큼만 끌어 쓰라. 왜 화가 나는지, 왜 자꾸 속는지 아는 사람은 화를 자제할 줄 알고, 쉽게 속지도 않는다. 생각과 싸우지 말라. 세상에 생각처럼 유용한 것도 없다. 생각이 무언지,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를 아는 사람은 생각을 말처럼 부린다. 그 위에 올라타고, 그것으로 밭도 갈고, 마차도 끌게 한다. 생각의 주인이 돼라. 그런 사람을 세인(世人)들은 깨달았다고 한다. 생각은 억압한다고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 속성을 알고 나면 저절로 다스려지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Power)이 있다. 그 말은, 원하기만 하면 가난이나 병마(病魔)에서 벗어날 힘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내면에 있는 힘을 믿지 않거나 사용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 힘은 없는 것과 같다. 그 힘은 '생각'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다. 하지만 '부정적 생각' 때문에 그 힘을 거부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애써 동호인, 에너지 수련을 하는 사람들과 정규적으로 만나라. 그들은 당신과 에너지를 나누는데 인색하지 않다. 에너지는 나눔으로써 더 많은 에너지가 얻어지기 때문이다. 병(病)은 마귀(魔鬼)와 같다. 그것 역시 당신의 생각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만이 마귀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진심(眞心)입니다." 너무나 흔히 듣는 말이다. 아마도 믿어 달라는 말일 게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쓰는지 궁금하다.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정보(識)를 가리킨다는 통상의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것들이 생기기 전(前) 바탕이 되는 마음, 즉 본래의 성품(本性)이다. 습관적으로 쓰고 있기는 하지만, "진심"이란 말을 하는 사람은 사전(事前)에 한 번쯤 그 의미를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혹시 그것을 통해 깨달음(見性)의 경지 해탈(解脫)을 얻을지도 모르고, 그다음의 삶이 무엇에도 끄달리지 않는, 평화롭고 바랄 것이 없는 인생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무엇으로 당신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하길,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존재의 증거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 몸이 당신인가?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대상이 당신인가? 저 산이, 저 시냇물 소리가,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당신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러면... 생각(마음)이 '나'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시간(時間)이 없으면 공간(空間)도 없지만, 시간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공간입니다. 공간이 없으면, 그것에 얹혀있는 모든 것은 신기루가 됩니다. 가만히 과거로 돌아가 보십시오. 거기에 당신의 첫사랑을 불러와 보십시오. 거기에 당신이 만났던 사람과 사건들이 있습니다. 10년 후로 가보십시오. 모양은 달라도 거기에도 사람과 사건이 있습니다. 시간은 생각들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이 무너지면 거기에 남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텅 비고 고요함만이 있습니다. 거기에 늘상 함께 있었으면서도 가늠하기는 어려운 영지(靈智)가 묵묵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진면목(眞面目)입니다. 시간도 공간도 단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비실재(非實在)일 뿐입니다.
생각을 내려놓는 것, 분별하지 않음(唯嫌揀擇), 이 두 가지가 깨우침의 직코스이다. 스승들은 에고를 내려놓으라 한다. 에고는 생각이고, 좋다-나쁘다를 분별하는 중심이기 때문이다. Epoche(판단정지)란 에고를 물러서게 하는 것이며, 그 자리엔 자각(自覺)만 남게 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하는가? 에고에 매달리지 말라. 에고가 없어도 나(自覺)는 존재하지만, 내가 없으면 에고도 없다. 에고가 없이 살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단지 진여(眞如)의 그림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