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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직접 하지 않고 남의 하는 일을 보고 자기가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직접 가보지 않고 사진(영상물)을 보면서 마치 자기가 거기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직접 해보거나, 들어보거나, 맛을 느끼는 대신, 대리만족을 자기 것이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안전할지 모른다. 하지만 직접 하지 않으면 양이 차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내가 깨닫기보다 깨달은 자 앞에 엎드리기 좋아하고, 그의 말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따르며 사는 많은 사람이 있다. 성경을 직접 보기보다 신부나 목사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불경을 직접 챙기기보다 승려의 법문으로 대신 하는 많은 사람이 있다. 하지만 선도(仙道)는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다. 그리고 할 말이 그리 많지도 않다. 정기신(精氣..
'몰입(沒入)'이란 정신이 하나에 고정되어 그것만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하며, '멍때림'이란 생각의 고삐가 풀어져 이리저리 표류하는 것을 의미한다. 몰입은 목표점이 뚜렷한 반면, 멍때림은 뇌가 그저 일 없이 편히 쉬는 것이다. 몰입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멍때림을 더 선호한다. 몰입은 마음을 챙겨야 하고, 아울러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몰입은 뇌를 활성화하여 뇌에 근육(?)을 생기게 하지만, 멍때림은 '쉬었다'는 효과 외에 얻는 것이 거의 없다. 성적을 올리려면 몰입이 필요한데, 동기부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아니면 책상에 멍때리고 앉아 있기 마련이다. 몰입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목표점이 뚜렷하며, 아울러 자신감과 일의 성취력도 두드러진다. 손쉽고 짧은 몰입부터 시..
힌두사상을 모르고서 불교를 안다고 하기는 어렵다. Hindu가 불교의 뿌리라는 것은 사실상 부정할 수 없다. Brahman(梵)의 다른 의미는 힘, 즉 에너지요, Atman은 아상(個我)이다. 범아(梵我)는 하나(緣起)이므로, 일여(一如)를 알아야 비로소 실존(實存)을 이해할 수 있다. 죽음이란 梵我 연결고리의 해체이며, 그것으로 공부가 확인된다. 부처의 가르침은 당시의 시대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윤회를 부정하지 못했지만, 최종 목표를 남김 없는 소멸, 열반( Nirvana)에 두었으며, 그것을 해탈(Moksha)과 동일화했다. 선도(仙道)는 인간의 정체성을 성(性)과 명(命)으로 보고 있으며, 그 둘이 하나인 상태를 사람(生者)이라 한다. 仙道 수련은 한마디로 말하면 성명쌍수(性命双修)이다. 여..
仙道는 통기(通氣)로 시작한다. 축기가 첫 과정이지만, 그것을 위해 사전에 꼭 필요한 것이 通氣이기 때문이다. 통기를 건너뛰고 결코 축기(蓄氣)부터 시작하여서는 안 된다. 마음대로 잘 되지도 않거니와, 적(積)이라 하는 氣 뭉침을 뱃속에 생기게 하며 수행은 물론 건강에도 해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귀찮고 더러 힘이 들어도 움직이는 행공(動功), 즉 외단공(外丹功)으로 선도를 시작하는 것은 그런 피치 못할 이유 때문이다. 선도의 동작이 요가와 차별되는 것은 자세(Asana)보다는 초식(招式), 즉 연결된 동작들을 사용해 연공한다는 것이다. 보통 20분 정도를 진행하는데, 그 이유는 통기를 위해 최소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주로 굳어진 근육과 척추 골반 관절들을 푸는 간단한 동작들로 시..
죽은 철(徹) 스님을 생각나게 하는 말이지만, 사실은 옛적부터 깨달음이 무르익었음을 나타내는 말로 널리 쓰인 말이다. "어두웠을 때는 산이 산이고, 물이 물이더니, 깨닫고 나서 보니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더라.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보니,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더이다." 깨우침을 얻었으면, 산이고, 물이고, 그것마저 버려라. 마치 강을 건너고 난 사람이 배를 버리고 갈 길을 가듯이..
스승의 가르침 가운데 뇌리에 남는 것은 '좌도(左道)에 빠지면 공부를 끝까지 할 수 없다'는 말씀이었다. 그런 말씀은 선도(仙道) 속에도 좌도(左道)와 우도(右道)가 공존한단 말씀이었고, 지나면서 보니, 우도보다는 오히려 좌도가 더 많이 눈에 띄었었다. 인간의 속성(俗性) 때문인가? 좌도는 힌두는 물론이거니와, 기독(基督)과 불교(佛敎) 그리고 그 외의 것 모두를 장악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다. 사람은 심심한 걸 거의 좋아하지 않는다. 우도는 거의 싱겁고 밋밋한 반면, 좌도는 다이나믹한 재미를 주기 때문이 아닐까? 좌도와 우도에 대해 늘 찜찜하였는데, 이제서라도 자명(自明)한 한마디를 할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기쁘다. 좌도나 우도 역시 말과 생각에 속해 있음은 분명하나, 일단은 좌도와 우도의 구별부터..
조선시대 선비들의 다툼은 리(理)가 우선이냐, 기(氣)가 우선이냐 였다. 그러나 그것은 남자가 먼저냐, 여자가 먼저냐를 가지고 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남자 없이 여자는 없으며, 여자 없이 남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氣가 理를 따르고 있든(理發氣隨), 理가 氣를 타고 있든(氣發理乘), 그것이 문제는 아니다. 둘 중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 역시 없어지기 때문이다. 자각(自覺)을 이룰 때 사람들의 공통적 경험은 상당한 에너지(氣)의 체험이다. 그러나 관리(補任)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희미해지는데, 그것이 氣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상에 에너지 없이 작동되는 일은 없다. 깨우침을 얻었던 사람이 다시 우매해져 재관(財官)을 밝히거나..
묵조(默照)란, "묵묵하게 비춘다"는 의미가 있다. 여기서 묵묵하다는 것은 생각을 내려놓는다는 뜻이다. 간화선(看話禪)의 무자(無字) 화두(話頭)나 수미산(須彌山), 방하착(放下着)이 하나같이 생각을 내려놓는 방편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묵조선(默照禪) 역시 폄하 받아서는 안 된다고 본다. 유명한 조사선(祖師禪) 교사 한 분은 망상(妄想)이 생길 때마다 무릎을 탁 치는 것으로 깨어있음을 회복한다고 한다. 행법들을 비교해 보면 默照禪은 상당히 우아한 참선법(參禪法)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도(仙道)가 흐르는 氣를 인지하는 것(의수단전)으로 본래면목(本來面目)과 계합(契合)하듯이 말이다.
죽기 직전, "시간에 속았고, 세상에 속았다"고 한탄하고 간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하지 않으려면 변치 않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명상(冥想)입니다. 살다 보면 좋았다, 나빴다, 더러는 외롭고, 불안하고, 우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한순간 지나가는 바람과 같습니다. 그런 허망(虛妄)한 것들을 따라 살지 말고, 마음을 중심 자리에 두어 보십시오. 그런 것들이 모두 쓸고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명명(明明)히 살아있는 것이 있습니다. 기쁘면 기쁨을 알아차리고, 슬프면 슬픔을 알아차리는 '그것'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세상을 일으키고, 허무는 힘입니다. 그것을 알아채고 난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장난에 속지 않습니다. 그 자리를 늘 밝게 유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선도(仙道)에서는..
선도(仙道)가 불도(佛道)의 허망(虛妄)과 무아(無我)를 따르지 않는다 하여, 仙道는 생명(生命)만을 추구할 뿐, 깨달음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일부의 주장은 그릇된 것이다. 사람이 생명을 추구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人之常情)이며,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야말로 허망(虛妄)한 일이다. 생명과 깨달음은 둘이 아니어서, 생명의 추구가 곧 깨달음의 추구이다. 선도(仙道)의 행법은 현학적(衒學的)이지 않으며, 만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따를 수 있을 만큼 간단하다. 仙道의 공부는 의수단전(意守丹田)으로 시작해 의수단전으로 마무리한다. 그것은 마치 불도(佛道)가 지관(止觀)을 하나로 엮은 것과 같다. 일체(一切)를 내려놓고 단전(丹田)에만 의식을 둘 때 수행자는 의존(依存)으로 비롯된 분별과 망상에서 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