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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하늘을 올려다보고서, '하늘을 다 보았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늘에 올라 지상을 내려다본 후 해도 늦지 않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깨달음"이란 말을 들으면 대개는 시큰둥이다. 입바른 사람은 그걸 알면 뭐가 바뀌는데? 라고 비웃거나, 그런 건 배부른 사람들의 망상놀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자성(自性)을 깨우친 사람이라면 아마 빙긋이 웃을 것이다. 그리고 뜬구름 잡는 소리는 아니라고 말 할 것이다. 그리고는 그들이 하는 소리를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것이 화광동진(和光同塵)이 아닐까?
'의리선(義理禪)'이란 공안(公案)의 이치를 따져 그 의미를 깨우쳐 나가는 禪을 말하는데, 바람직하지 않다 하여 사구선(死句禪)이라고 한다. '여래선(如來禪)'은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 禪定(Samadhi)을 닦는 禪을 말하지만, 그 속에 말과 이치의 길이 남아 있다 하여 최고로는 쳐주지 않는다. '조사선(祖師禪)'은 일반적으로는 혜능(慧能)과 그의 직제자들이로 이어지는 선법(禪法)을 말하지만, 보통은 스승이 제자의 근기(根器)를 보아가며 문득 일러주는 공부법을 말한다. 특별한 조건(禪定)을 강요하지 않으며, "평상심(平常心)이 道"라는 말처럼 일상생활에서 경험되는 근원적인 마음(自性)을 발현시킨다. 선도仙道는 단전(丹田)을 이용해 입정(入靜)한다. 통기(通氣)와 축기(蓄氣)를 동시에 진행하는데 조사선 기..
마음공부는 덜어내는 공부고, 단전공부는 더하는 공부입니다. 더하기를 잘해야 빼기도 잘할 수 있습니다. 그 둘은 한통속입니다. 마음공부는 덜어내고 덜어내 남김없이 비워져야 잘하는 공부고, 단전공부는 더하고 더해 단전(丹田)이 진기(眞氣)로 넉넉해져야 잘하는 공부입니다. 누진통(漏盡通)은 두 가지 뜻으로 쓰입니다. 佛道에서는 그것을 번뇌가 모두 녹아 없어진 것을 말하지만, 仙道의 누진통은 글자 그대로 새어나가는 것(漏)이 그쳐(盡) 丹田이 충실해진 것을 말합니다.
억지로 호흡을 늘리려 해서는 안 됩니다. 100% 실패합니다. 창고에 물건을 더 넣으려면 이미 들어있는 물건들의 정리가 필요하듯 호흡을 늘릴 결심이라면 먼저 체중조절, 특히 뱃살 정리가 우선 되어야 합니다. 앉아서 편하게 하려는 마음은 버리셔야 합니다. 빠르고 숨찬 운동보다는 부드럽게 천천히 움직여 주는 운동과 함께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호흡을 안정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운동을 일 삼아 해서는 안 됩니다. 재미를 느끼는 운동을 찾으세요. 그리하면 운동이 취미가 됩니다. 태극권을 권합니다. 그것보다 더 탈없이 호흡을 안정시키는 방법은 없습니다.
사랑(Sex)을 나누는 동안, 그리고 그 이후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매우 훌륭한 수행입니다. 사람들이 Sex에 몰두하는 이유는 그것이 번뇌 망상을 묶어두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는 그의 아들에게 탄트라를 가르쳤으며, 그것으로 깨달음을 얻게했다는 설이 있는데, 그것은 Sex가 가진 매카니즘 때문일 것입니다. 멍 때리고 앉아있는 것만이 수행은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으로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선도(仙道)는 모든 것을 의수단전(意守丹田)으로 통하게 합니다. 망상을 사라지게 하고 깨달음을 얻는 데 그것보다 효과적인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 방해받는 이유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들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에게 있어 그것의 해결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이다. 그동안 셀 수 없을 정도의 선정(禪定)이 이르는 法이 우리에게 소개되었다. 仙道는 의수단전(意守丹田)에 공을 들인다. 그것이 번뇌 망상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성명쌍수(性命双修))를 표방하는 선도(仙道)는 에너지(氣) 활성화 더불어 고요함에 이르는 두 가지 기능이 필요하며, 의수단전이 그 두 가지 필요를 충실히 충족시킨다. 仙道수행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丹田은 선도의 알파요, 오메가이며, 효과 면에서도 무엇보다 뛰어나다. 그것에 마음을 둠으로 우리의 목적을 달성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깨달음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으나, 수행자에게 있어 깨달음이란 “나는 누구인가?”를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힌두(Hinduism)이든, 불교(佛敎)이든, 선도(仙道)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약간의 기법(技法)상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힌두들의 깨닫는 법은 보통 만트라(Mantra 또는 진언[眞言: 참된 말, 진실한 말, 진리의 말] 혹은 밀주(密呪) 또는 다라니(陀羅尼)라고도 하며 "영적 또는 물리적 변형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겨지고 있는 발음, 음절, 낱말 또는 구절)를 통해 사마디(Samadhi, 禪定, 三昧)를 체험함으로 신(神) 혹은 진리와 합일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힌두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방법론에 있어 다양한 방법을 구사합니다. 힌두처럼 만트라(呪力)를 사용하기도 하고 관법(觀..
자기를 깨우치고 다스리는 다양한 행법들이 있고, 원하기만 한다면 충분한 정보가 한없이 공급되는 편리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중 어떤 정보도 버릴 것은 없으며, 각자의 취향과 체질에 맞는 것을 선택하여 자기를 깨우치고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단, 편견을 떠나 좋은 정보를 선택하는 능력만 있다면 말이다. 현대과학이 앞으로 얼마나 발전할지는 몰라도, 우리의 영원한 숙제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능력을 갖췄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모양으로 살아갈 것인가?’이다. 그중에서 ‘나는 누구인가?’란 숙제를 먼저 해결한다면 나머지는 저절로 풀린다고 필자는 믿는다. 그것을 견성(見性)이라 하는데, 그것에 대하여 어떤 이는 마음만 다스리면 된다고 하고, 어떤 이는 호흡에 있다 하며, 또한 현대의학을..
선도(仙道)는 기(氣) 공부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外道(佛道, 儒道, 基督)들과 차별된다. 기는 만물을 살아있게 하는 원동력으로 그것의 적절한 운영으로 만물은 생장하고, 그것이 다하면 아무리 견고했던 것이라 하더라도 맥없이 스러지고 만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몸과 마음 그리고 기(에너지)가 흩어지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 셋 중 하나라도 부실하거나 분리되면 우리는 정상적인 생명활동을 유지할 수 없다. 생명의 핵심은 기이다. 그것이 몸과 마음을 연결하는 활력소이며 우리를 살게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고도의 정신세계와 강건한 육체를 가졌다 할지라도 기(에너지)가 떨어지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죽음이란 기의 기능이 정지되어 정신은 허공에 흩어지고, 몸은 분해되어 흙으로 ..
모든 견성공부(見性工夫)는 대상(對象)에 대한 몰입(沒入)으로 시작한다. 기도(祈禱), 지관(止觀), 간화선(看話禪), 관상(觀想), 염불선(念佛禪), 단전호흡(丹田呼吸) 등등 모든 수행(修行)의 귀결(歸結)은 사마디(Samadhi), 즉 삼매(三昧)이다. 선도(仙道)는 의식(意識)으로 氣(에너지)를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 의수단전(意守丹田)으로 삼매(三昧)에 이르고 그것을 통해 견성(見性)한다. *의수단전이 중심(中心)이 되어야 하는 이유: 氣는 육체(肉體)와 정신(精神)의 양쪽에 걸쳐 생명력(生命力)의 원천(源泉)이며, 상대계(相對界)와 절대계(絶對界)를 수렴(收斂)한다. 氣는 본성(本性)에 가장 가깝다. 즉, 수련(修鍊)의 과정(過程) 중 모두가 유실(流失)되어도,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