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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Q : 선도(仙道)에서 바라본 뇌(腦)는 무엇입니까? A : 마음의 물질적 작용처입니다. Q : 마음은 무엇입니까? A : 진여(眞如)가 만들어낸 도구입니다. Q : 眞如는 무엇입니까? A : 본래면목(本來面目) 즉 "진짜 나"입니다. Q : 마음은 어떻게 움직입니까? A : 기(氣)가 흐르는 대로 작용합니다. Q : 氣는 어떻게 움직입니까? A : 마음이 가면 氣도 갑니다. Q : 마음과 氣는 어떤 관계입니까? A : 그 둘은 하나입니다. Q : 眞如는 스스로 있는 하느님 같은 존재입니까? A : 아닙니다. 眞如도 에너지(氣)가 없이는 행세(行勢)하지 못합니다. Q : 그렇다면 氣가 제일인자(第一因者)입니까? A : 아닙니다. 氣도 眞如가 없이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Q : 그러면 眞如와 氣는 어떤 관계..
이 몸과 마음은 내가 아니고, 내가 사용하는 도구다? 그렇다면 '나'라는 느낌, '나'라는 생각은 어떠한가? 그것 역시 태어나서 지금까지 어디를 가든 변한 적이 없다. 그것이 '나'란 말인가? 기억이 가미된 생각이라면,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뇌가 만든 조작물(造作物)이다.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생생한 이것, 순간순간 알아채고 있는 이것, 바로 이것이 여래(如來) 자성(自性)이다. 자성(自性)은 한끝의 빈틈도 있어선 안 된다. 부정할래야 도무지 부정할 수 없다면, 이젠 그만 의심을 그쳐야 한다.
'스트레스(Stress)'란, 외부 혹은 내부로부터 기인하는 압박감이며, 트라우마(Trauma)는 스트레스로 인하여 생기는 결과(상처)이다. 우리의 삶은 경중(輕重)의 차이가 있을 뿐, 스트레스의 연속이며, 그것들 중 심각하게 마음에 각인(刻印) 된 것이 트라우마이다. 스트레스를 가라앉히고 트라우마를 가라앉힌다는 여러 가지 치료법들이 소개되고 있으나, 그 효과는 일시적이다. 잎 몇 개를 따내고, 가지 몇 개를 베어냈다고 해서, 나무가 죽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대 심리를 파악해내고, 심층 심리에, 약물(?)을 투입했다 할지라도, 문제를 말끔히 해결한 것은 아니다.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원인자(原因子)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나"라고 믿고 있는 한, 스트레스와 ..
"진심(眞心)입니다." 너무나 흔히 듣는 말이다. 아마도 믿어 달라는 말일 게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쓰는지 궁금하다.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정보(識)를 가리킨다는 통상의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것들이 생기기 전(前) 바탕이 되는 마음, 즉 본래의 성품(本性)이다. 습관적으로 쓰고 있기는 하지만, "진심"이란 말을 하는 사람은 사전(事前)에 한 번쯤 그 의미를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혹시 그것을 통해 깨달음(見性)의 경지 해탈(解脫)을 얻을지도 모르고, 그다음의 삶이 무엇에도 끄달리지 않는, 평화롭고 바랄 것이 없는 인생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운전할 때 핸들을 놓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핸들을 놓고 차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 기대하는 것과 같다. 길을 모르고 내비게이션에만 의존하는 사람 역시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내 차의 핸들이 내 마음에 따르듯이, 나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길이 파여 울퉁불퉁할 수 있듯이,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우울하도록 그냥 두거나 비탄에 잠기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일들이 내 의사에 반해 나타난다고 생각하지 말라. 지성은 내가 가는 길에 내가 책임지는 능력이다. 아주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에겐 형체는 분명치 않아도,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마음이라 하며, 천변만화를 일으키는 바로 그놈입니다. 그놈 속에는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이 이미 갖추어져 있어서, 비우면 비울수록 그것의 기능이 형상됩니다. 비울 것은 생각들과 그것이 굳어진 믿음이란 놈입니다. 그것들이 쓸어내지면, 그 자리엔 자성(自性)만 남습니다. 그 쓰레기들(생각들과 믿음)은 분명 일시적으로는 유용했었지만, 그것들은 마치 점령군과 같습니다.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마음 비우기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모두들 마음으로 마음을 비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검사(檢事)의 범법을 한통속의 檢事들로 밝히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
닦는다는 것은 씻어낸다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드러난다. 1. 일단 마음을 고요하게 할 줄 알아야 한다. 2. 자기에게 초점을 맞춰 마음이 어떻게 흐르는지를 알아채야 하고, 3.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관찰해야 하고, 4. 마지막으로 다시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 된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데는 단전(丹田)에 마음을 두는 것 즉 의수단전(意守丹田)이 으뜸이다. 丹田이 아직 열리지 않은 사람이라면 복식호흡과 함께 하복부 중앙에 마음을 두면 된다. 연습이 반복될수록 단전으로부터 에너지가 들고 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단전은 생명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선도(仙道)는 단전으로 시작해, 단전으로 끝난다.
견성(見性)이란 움직이지 않는 그 자리, 세상에 두루한 그 자리를 알아채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알려면 마음(생각)을 쉬게 하고, 마치 렌즈로 먹지를 태우듯이 초점을 잡고 기다리면 됩니다. 간단합니다. 깨우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쉽다고 말입니다. 알음알이를 내려놓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느긋하게 기다리면 됩니다. 그러면 깨닫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실천가(實踐家)들이며, 목소리만 큰 사람을 공론가(空論家)라고 한다. 空論과 實踐 중 당신은 어느 쪽에 더 마음을 두는가? 교리(敎理)가 우선인가? 실수련(實修鍊)이 중요한가? 교리로는 깨닫지 못한다. 깨닫기 위해선 실수련이 꼭 필요하다. 마음 중심으로 수련을 할 것인가? 몸을 닦아 그것으로 마음이 닦여지게 할 것인가? 선도(仙道)는 두 가지를 동시에 닦으라 가르친다. 그것을 성명쌍수(性命双修)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