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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듯이, 보이고, 들리고 느끼는 것이 있는 한, 마음은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마음을 적정(寂靜) 상태로 유지하겠다는 것은 바람을 불지 않게 하겠다는 것, 즉 자연을 거부하겠다는 것입니다.바람은 불도록 두어야 하고, 흐르는 강물은 흘러가도록 두어야 합니다.마음이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불안하면 불안한 대로, 그대로 두고, 다만 그것을 알아채기만 하십시오.열흘을 내리 부는 바람은 없고, 내가 보았던 강물은 어느덧 저 멀리 사라지고 없습니다.고락(苦樂)은 하나입니다.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알아챔의 기둥만 세워 놓고 있다면, 세상만사는 한편의 교향곡입니다.걱정하지 마십시오.오면 가게 되어 있고, 가면 다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그것이 이치(理致)입니다.
"수행에 몸의 움직임은 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있다. "의념만으로 단전을 깨우겠다"는 사람도 있다.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수행이란, 몸과 마음의 오케스트라이기 때문이다. 단전이 열리고 나면 자연히 알게 된다. 모든 기맥(氣脈)이 단전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이다. 몸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막혀있던 기맥들이 열려야 그 기운이 단전 활성화로 연결된다. 외단공(外丹功)은 일반적인 운동과는 다르다. 그것은 단전과 온몸을 연결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단지 의념만으로도 수련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공부의 마무리를 기대할 수는 없다.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니란 것을 이해했다고, 그것을 깨달음이라 해서는 안 됩니다. 외로움, 우울함, 그리고 불안감에 자주 휩쓸린다면... 또한 ‘인정받음’에 우쭐하고, ‘인정 못 받음’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시각(視覺)이 늘 내면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멍하게 있어서는 마음에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선도(仙道)는 의수단전(意守丹田)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기운을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으며, 시각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의수단전은 마음이 단전(丹田)에 모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선 우선 단전을 잠에서 깨어나게 해야 합니다. 막연한 것에 우리 시선을 향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복식호흡(腹式呼吸)을 단전호흡(丹田呼吸)이라고 오해해..
"실존(實存)은 본질(本質)에 우선한다." 기존의 철학을 입 다물게 한 사르트르의 말이다. 주기학(主氣學)이 주리학(主理學)에 대항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 실학(實學)이 허학(虛學)을 덮듯이... 어찌하여 實存은 本質에 우선하는가? 실존은 본질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實存이란 무엇인가? 주체성을 가진 '지금 여기, 이 존재', 그것이 실존이다. 세상을 따라 살지 말고, 나를 살아야 한다는 주장이 실존주의다. 하지만 말만으로의 실존주의는 虛學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가 누군지, 자기 본질을 모르는 실존주의는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와 '나의 것'을 구별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소유물은 나를 편리하게 해주지만,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습니다. 바뀔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임시로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 몸은 내가 아닙니다. 이 마음도 나는 아닙니다. 늘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없다(無我)'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 말하는 이유는 이 몸과 마음을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들 외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선도(仙道)에서는 '기(氣)'와 '신(神)'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불변의 법칙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氣에 神에 관심을 가져보십시오. 불안이 없는 넉넉한 인생을..
오온(五蘊)을 '나'라고 믿고 있는 사람에게, '나'는 없다. 그것들은 조건에 의해 있는 것이므로, 조건이 다하면 자연 속으로 환원(還元)되고 말기 때문이다. 오온이 '나'라고 믿고 있는 그들에게, 당연히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웃고, 울고, 움직이는 것은 모두가 오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라. 우리 사람에겐 五蘊을 작동시키는 무엇(에너지)이 있고, 그것을 지켜보는 '무엇'이 있다. 만약, 당신 의식이 에너지(氣)와 지켜보는 자에 맞춰질 수 있다면, 영영토록 존재할 수 있다. 선도(仙道)에서 기(氣)를 중시하고, 氣와 신(神)을 계합(union)시키려 애쓰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그 조건이 충족되는 한, 당신은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산다.
'신행즉기행(神行卽氣行)'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이 가면 기도 간다'는 뜻이다.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유는 마음이 덜 닦였기 때문이다. 수련을 하면 마음이 가는 곳으로 氣가 가는 것을 안다. 간단히 실험해 보자. 손바닥에 마음을 보내 고정해 보라. 그곳에 氣가 생기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 손바닥에 마음을 보내 그곳에 氣가 머물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단전(丹田)에 마음을 보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연히 의수단전(意守丹田)이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잘되지 않는 사람은 먼저 마음의 폭을 넓혀야 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마음을 닦는다고 한다. 마음을 닦으면 마음이 순수해진다. 그리되면 '된다', '안 된다'가 사라지고, 마음을 보내는 곳이면 어디든 氣는 간다. 먼저 몸부터..
몸과 마음 중 주체는 무엇인가? 이성(理性)을 몸에서 떼어낼 수 있는가? 살아있는 한, 몸과 마음은 하나로 묶여있어 분리할 수 없다. 그때, 그 사람의 몸은 그 사람의 정신이고, 그 사람의 정신은 기존의 몸에서 발현한다. 몸의 변화에 따라 마음도 변하며, 신체적 경험이 이성을 지배한다. 설득하려 하지 말라. 상대가 설득당하려 하지 않는 한, 설득은 불가능하다. 이성과 감정이 싸우면 99% 감정이 승리한다. 이성은 정신의 소속이요, 감정은 몸의 소속이다. 마음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먼저 몸을 변화시켜야 한다. 먼저 몸이 바뀌어야 한다. 몸을 바꾸지 않고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람은 합리적이지 않다. 이익 우선, 이성 우선인 듯 해도 결정권은 신체 속에 녹아있는 감정에 있다.
수행에 몸의 움직임은 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있다. 의념만으로 단전을 깨우겠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편견일 수 있다. 수행이란 몸과 마음의 오케스트라이기 때문이다. 단전이 열리고 나면 자연히 알게 된다. 모든 기맥(氣脈)이 단전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이다. 몸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기맥들이 열리면, 그 기운이 그대로 단전 활성화로 연결된다. 외단공(外丹功)은 일반적인 운동과는 다르다. 그것은 단전과 온몸을 연결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단지 의념만으로도 수련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몸과 마음이 합해져야 큰 진전을 기대할 수 있다.
선도(仙道)를 닦는데도 50% 정도는 선천적 경향이 필요한 것 같다. 누구는 쉽고 누구에게는 어렵기 때문이다. 선도공부에는 일단 머리보다 몸이 더 중요하다. 좋은 감수성도 빼놓아서는 안된다. 따라서 무디어졌다면 다시 살려내야 한다.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가능한 대로 자연과 벗하며 살면 감수성이 회복된다.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어린아이이고, 그래야 기운 공부에 적합하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마태 18:3)" 너무 물질적(계산적)이지 않은 사람, 자연을 보고 쉽게 감동하는 사람, 기본적으로 자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호기심은 많으나, 선천적으로 의심이 적은 사람이 어린아이다. 나이가 어리다고 모두 감수성(感受性)이 풍부하지는 않다. 동의할지는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