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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예수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간단하게 이야기한다. 그것이 많은 지식인이 예수를 따르는 이유다. 예수처럼 '해탈(자유)'을 쉽게 이야기한 사람은 없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그리고 진리에 대해서도 내가 바로 진리라고 했다. 내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무아(無我)와 자아(自我)에 대해 간단히 말하자. 인식(認識)한다는 것은 존재(存在)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나’는 실재한다. 그리고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는 없다. 왜 ‘나’ 말고 진아(眞我)라는 말을 끌어와야 하는가? 그것으론 부족한가? 지금 이 ‘나’는 허깨비인가? 아니면 없애야 할 대상인가? 누가 뭐라고 말해도 여기 ‘나’는 있다. 있는 것을 없다고 한다고,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나’는 여기 이렇게 성성(惺惺)하지 않은가? 인식이 있는 한 ‘나’는 언제나 여기 있다.
선가(仙家)에 '비인부전(非人不傳)'이란 말이 있다. '사람의 됨됨이가 되지 못한 사람에겐 전하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의 됨됨이는 누가 정하는가? 그것은 타인(스승)이 정하는 것이 아니요, 배우는 자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낮추고, 스승의 말에 귀 기울이는 자는 됨됨이가 된 사람이요, 조금 얻은 것으로 기고만장하여 스승 앞에 머리를 치켜드는 사람은 됨됨이가 덜된 사람이라 봐야 한다. 스스로를 높이는 자에게는 전하려 해도 전할 수 없다. 귀를 닫아 놓고 있기 때문에 몇 년을 스승 곁에 있어도 진전이 늦다. 그러므로 미리 판단하지 말고 쉽게 전해진다면 됨됨이가 된 사람이요, 애를 써봐도 전달하기 어려운 사람은 됨됨이가 안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바른 제자 하나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란 ..
소주천은 왜 필요한가? 마음과 기운을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며 살아야 한다. 감정이 나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 생각을 자유자재로 일으켜, 그것으로 생각을 통제 조절하며 살아야 한다. 인지력(認知力)을 길러야 한다. 인지가 없는 나는 '나'일 수 없기 때문이다. 소주천(小周天)이란, 내가 마음과 생각, 그리고 인지처(認知處)의 주인이 되는 훈련이다. 심기(心氣)를 내 몸 구석구석까지 옮길 수 있어야 한다. 크게, 작게도 만들 수 있고, 안팎 어디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해야 한다. 내가 주인이 되어 사는 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이해하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실현하며 사는 데 소주천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다.
싯다르타는 명쾌했다. 그것이 그의 위대성이다. 그는 무상, 고, 무아라는 간단한 이치를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만 살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무상(無常)이 고(苦)를 낳지만, 무아(無我)라는 한마디로 모든 문제는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불교는 너무 복잡하다. 파벌도 파벌이지만, 가르침도 상이하다. 간단히 無我라 알고 살면 쉬울 것을, 힌두로부터 진아(아트만)와 윤회를 끌어들인 것으로 부족해, 용수(龍樹)의 중관(中觀)에 요가로부터 유식학(唯識學)까지 가져왔다.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은 선택해야 한다. 따지지도 묻지도 말고 신앙할 것인가, 아니면 풀리지 않는 미궁(迷宮) 속에서 쉼 없이 허덕일 것인가라는 기로(岐路)에 서야 한다. 진리는 쉽고도 명료해야 한다고 배운 사람들에게 말이다.
불교의 핵심을 말하자면,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즉 무아(無我)이다. 그것이 싯다르타 깨달음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바라문교(힌두교)는 유신론이다. 창조, 유지, 파괴를 담당하는 삼주신(Trimurty로서 Brahma, Vishunu, Shiva)을 신앙하며, 개체적 자아인 Atman이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Brahman과 합해지는 것을 최종적 희망으로 생각한다. 그 신앙 체계를 뒤엎은 것이 불교이다. 불교의 교리 체계는 거의가 無我를 증명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승(大乘)이 출현하며 힌두의 윤회까지 받아들이더니, 無我가 진아(眞我)라는 해괴한 믿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부처의 가르침인 無我를 부정할 수는 없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
어리석은 자는 몸을 다스리고, 지혜로운 자는 마음을 다스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견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없이 어찌 몸을 다스릴 수 있으며, 몸을 다스리지 않으면서 어찌 몸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말로만 집을 지으려 하는 사람은 곁에서 물리치시고, 우선 쉬운 쪽부터 시작하십시오. 몸 다스리기가 편한 사람은 몸부터 바로 잡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용이한 사람은 자기 마음부터 항복 받으십시오. 몸이 바로 잡히려면 마음이 따라주지 않고는 안 되고, 마음을 좌지우지하려면 몸부터 다스려져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둘로 나누어서, 몸은 어리석고, 마음 운운해야 지혜롭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십시오. 귀신은 道 닦기가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귀신은 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몸을 가지고 있을 때, 따지지 말..
외부의 것, 즉 소유와 지위를 통해 자기 존재감을 나타내려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늘 불안하다. 그것들은 무상(無常)하며, '나'와는 유리(遊離)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유하지 않아도, 차지하지 않아도, 늘 나와 함께 있으며,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 자신'이다. 우리가 불행해지는 것은 관심을 외부로만 돌리기 때문이다. 가지지 않아도 나는 존재하지만, 내가 유명무실하다면 소유나 지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언제나 나는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 때 묻지도, 깨끗하지도 않다. 그것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지금 당장은 몰라도 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지금 여기 이렇게 있다는 것이다.
수행을 하는 중에 더러 뻥 뚫린 허공을 체험하는 경우가 있다. 한마디로 체험은 체험일 뿐,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함부로 전체 의식을 들먹이지 말라. 그것은 삼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며, 의식(意識)을 지니고 있는 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잠시 멍한 상태에 있었다고 전체 의식을 체험했다고 하지 말라. 단지 멍때리고 있었을 뿐이다. 먼저 에고를 알아차려라. 그것이 자기를 아는 첩경이다. 남의 목장 소가 몇 마리인지 세지 말라. 우리 안에 있는 내 소에 정성을 들여라. 남의 목장 소만 넋 놓고 보고 있다가 내 소가 난동을 부릴지 모른다. 에고에 집중하라. 그것이 에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다. 전체 의식은 연신환허(鍊神還虛), 즉 神 공부가 마무리된 연후에나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주시(注視)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마음은 그곳으로 옮겨간다. 그다음은 마음의 방향성인데, 시각화(視覺化)가 그 일을 한다. 그리고 그 내용에 따라 우리의 삶은 변해간다. 가급적 원치 않는 것, 피하고 싶은 것을 시각화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쥐를 박멸해야 해'라고 할 때, 우리는 먼저 쥐를 떠올린다. 그 습관을 극복하지 멋하는한 우리는 쥐와 함께 ㅅ살 수빆에 앖다. 생각에는 일어나는 생각과 일으키는 생각이 있다. 일어나는 생각들에 늘 깨어있어야 한다. 아니면 남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일으키는 생각으로 일어나는 생각을 통제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비결이다. 의수단전(意守丹田)은 생각 조절 훈련에 가장 좋은 방법이다. Energetic한 삶은 물론, 시각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