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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깨달음을 일별(一瞥)하였다 할지라도 신뢰하는 스승에게 귀의(歸依)가 없는 한, 그야말로 일별에 그치고 만다. 그것은 거의 모든 각성자(覺醒者)들의 공통적 의견이다. 여기서의 스승은 물론 살아있는 선지식(善知識)만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살아 숨 쉬지 않는 경전(經典)이나 어록(語錄), 그리고 매체(媒體)는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진여자성(眞如自性)을 작용시키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물론 움직이기 어려운 귀한 인연(因緣)을 타고난 수행자에게는 예외이지만 말이다. 그것은 소주천(小周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의념주천(意念周天)이라면 모를까, 단전(丹田)이 깨어나고 여실(如實)한 기운에 의해 주도되는 소주천이라면 꼭 이미 주천을 이룬 스승의 도움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분명히 깨달음의 인..
나에게 "너는 어찌하여 선도(仙道)를 선택하였는가?" 묻는다면 운명적이라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그것은 마치 이과(理科)의 사람에게, "당신은 어찌하여 골치 아픈 수학을 재미있어하는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수행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바로 자성(自性)을 깨우치려 시도하는 공부법이고, 다른 하나는 일단 에너지(氣) 공부를 통해 본래면목(本來面目)과 계합(契合)하는 공부다. 자아(自我) 탐구하는 법도 여러 가지가 있으며, 에너지(氣) 수련법도 그 갈래가 수없이 많아, 문파별로 자기들이 하는 수행법이 으뜸이라고 하지만, 문외한이 볼 때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렇다면 세상엔 왜 수많은 수행법이 있는가? 그것은 각기 다른 많은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Mantra..
스승은 제자가 필요하고, 제자 역시 필요에 의해 스승을 만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스승에겐 제자가 필요하지만, 제자는 스승의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다. 스승이 가진 것을 모두 나누어 주어 얻을 것이 점점 없어지기 시작해 나중엔 그에게서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럴 때, 스승은 빨리 눈치를 채고 제자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으니 이제 내 곁을 떠나거라" 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그 자리를 선선히 떠나줘야 한다. 그리되었을 때 스승과 제자의 좋은 관계는 영원히 지속된다. 하지만 그리되지 못하면 스승과 제자는 원수처럼 된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의 묘한 관계다. 하지만 스승도 공일만은 아니다. 스승은 언제나 제자의 몇 m 앞을 달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깨달음이 없는 수행은 수행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주소 없이 서울 김 서방을 찾는 것이다. 손에서 책을 내려놓아라. 책은 많이 읽을수록 망상에서 벗어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시작점에 한 끗발만 어긋나도 도착점에 가면 그 오차가 감당키 어려울 만큼 벌어진다. 믿을만한 스승 문하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길을 한번 잘못 들어서면 간 만큼 되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돈오돈수(頓悟頓修)냐 돈오점수(頓悟漸修)냐로 다툴 뿐, 수행이 먼저라는 생각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지금 당장 깨달을 수 있다. 깨달음은 수행이 필요치 않고,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당신은 이미 깨달아 있다는 말은 아무리 해도 부족하다.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당신에게 깨달음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깨달..
천국을 말하지만, 기독교의 최종은 하느님 품에 들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극락을 말하지만, 불교의 최종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음(無常)을 알아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음을 깨우치는 것이며, 선도(仙道)의 최종은 에너지(氣)와 하나가 되어 신선이 되는 것입니다. 길은 다르나 모두가 '나'의 근본을 찾는 일입니다. 난로 옆에 있으면 따뜻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난로만 끼고 살 수는 없습니다. 스승 역시 몸을 덮혀주는 난로일 뿐입니다. 최종은 자기 안을 생명 불꽃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타인의 여유로운 말과 행동을 내심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 타인의 씩씩한 모습이 이유 없이 마음에 걸리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의 눈에는 그런 모습이 오만(傲慢)으로 비친다. 그것이 열등감 때문인 줄을 그는 모른다. 타인들은 자기 앞에 언제나 다소곳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절대로 자기를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기만 건방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 도덕 기준에 맞게 말하고, 행동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오만 덩어리인지 모른다. 선생이나 종교 지도자를 자처하는 자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 어둡다. 시선이 외부를 향하고만 있기 때문이다. 씩씩함과 여유로움보다 더 근사한 것은 없다. 여유로..
시타르타는 나무 밑에 앉아 새벽별을 지켜보다가 깨달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무심(Don’t think))으로 지켜볼 수 있느냐로 깨달음의 성패가 갈리듯 단전 역시 깨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지켜보는 것(Just look)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의수단전(意守丹田)이라 합니다. 丹田이 깨어남과 견성(見性)은 한통속입니다. 둘 다 주시자(注視者)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丹田은 지켜보는 것만 가지고는 2% 부족합니다. 꾸준한 외단공(外丹功)으로 기운의 유통을 시켜줘야 합니다. 펌프 물을 끌어 올릴 때 한 바가지의 물이 필요하듯 단전 역시 마찬가지로 기본 에너지(氣) 충전이 필요합니다. 마치 스마트폰처럼 말입니다. 당신이 지금 50세라면 단전은 50년 동안을 휴식 상태로 있었습니다. 혼자 힘만으로는 깨어나기 어..
최고의 名品을 파는 사람은 자신감으로 장사를 한다. 그는 호객하지 않으며, 상품의 가치를 아는 고객만을 귀하게 모신다. 그에겐 재고가 없다. 물론 세일도 하지 않는다. 시즌이 지나면 그는 남은 상품들을 불태워 버리므로 가치를 높인다. 스승 역시 인연 있는 제자(弟子)만을 거둔다. 그에겐 미련도, 아쉬움도 없다. *유머* 손님 : 아줌마 이 수박 한 덩이 얼마요? 주인 : 네, 하나에 만 이천 원입니다. 손님 : 좀 비싼데 깎아줘요. 만 원에 주면 안 될까요? 주인 : 냅둬유~ 소나 주게유~
기(氣)는 파동(波動)이면서 입자(粒子)이다. 氣 수련이 무르익으면, 파동이 일어나고, 입자가 움직이는 것을 누구나 실감한다. 氣 치료란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마음이 일으키는 긍정적 파동에 약(藥)이 되는 입자를 실어 보내는 것이다 . 그러므로 몸을 맡길 때는 믿음과 성심(誠心)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양자의 마음에 콜라보레이션를 이루게 한다. 보내는 파동과 입자가 환자와 동조(同調)를 이루면 기적이 일어난다. 파동이 강화되면서 치유의 입자(藥)를 많이 흡수하기 때문이다. 그것에 따라 치료 효과가 결정되고, 거기에서 氣의 실제성이 드러난다. 스승과 함께 수련할 때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