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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하루는 악마가 사람들이 마시는 우물에 독을 탔다. 악마가 독을 탄 것을 아는 사람이 있었고, 그는 당연히 그 우물물을 마시지 않았다. 그 독은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것이었고, 그 후 사람들은 미쳐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 취급을 하게 되었고, 결국은 그가 그 나라에서 살지 못하게 만들자, 그 역시 그 우물물을 마셨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인 Thomas Szasz는 “정신질환이라는 것은 감염병처럼 "병이다, 아니다"를 나눌 수 있다기보다는, 어느 한 사회가 사회의 규범으로 정해 놓은 것에 맞지 않으면 정신질환이다. 고로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 사느냐에 따라 정신질환의 정의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과학적인 검사(?)에 의해 확실히 밝혀지기 전에는 말이..
자기가 누군지를 깨닫고 나면, 보통은 환희심에 휩싸인다.그리고 누군가에게 그것을 전해주려 한다.하지만 그것을 받겠다는 사람은 가뭄에 콩 나기처럼 아주 희귀하다.오히려 과대망상 내지는 현실도피가 아닌지 의심하는 사람이 더 많다.그런 점에 싯다르타는 보기 드문 행운아이다.다섯 명의 제자를 얻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으며, 그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수천의 추종자를 지닌 성인위(聖人位)에까지 올랐으니 말이다.깨달음의 시대다.이젠 깨달음이 더 이상 자랑이 못 된다. 누구나 약간의 집중력만 유지하면 어렵지 않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시작하는 마당(初場)엔 끝장을 보겠다는 각오로 덤벼들어야 한다.'몰라, 괜찮아" 정도로는 남이 먹다 남긴 것 조금 얻어먹기에도 부족하다.깨달음의 가치를 알고, 당분간은 마..
깨달음은 알음알이가 아니다. 말로만 깨달았을 것 같으면, 세상 사람 모두에게 이밥에 고깃국을 매일 먹일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은 수학 문제나 수수께기 풀이가 아니다. 고로 문답만의 검증으로는 부족하다. 깨달았다면 몸과 마음, 그리고 말(身口意)로 비롯되는 삼업(三業)에 늘 깨어있어야 한다. 고로 늘 자기관조(自己觀照)와 자아비판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중도(中道)의 삶이 기본이며, 번뇌와 욕망이 일어나면 단칼에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죽는 순간까지 홀로서야 한다. 특히 자기 문제(특히 건강)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깨달았다 할만하다.
세상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에너지(氣)로 구성되어 있다. 보이는 것은 돈, 집, 옷, 자동차 같은 것들인데, 그것들은 한결같이 무상(無常)하다. 마음의 힘은 필요한 것들을 끌어올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들이 실체(實體)가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끌어올 때는 필요한 만큼만 끌어와야 한다. 당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넘치게 끌어오면 필히 부작용(病)이 생기는데, 그것은 자연의 법칙, 즉 인과응보(因果應報)이다. 운(運)이 좋아 쓰고 남을 만큼 끌어왔을 때는 남은 것은 세상에 꼭 필요한 곳으로 흘려보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의미(意味)를 만들어서 살아야 한다. 그리해야 하는 이유는 원래 의미가 없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보이지 않는 실체를 알아채야 한다. ..
두려움은 우리 모두의 문제다. 누구도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마찬가지다. 크게 짓는 개일수록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겁 많은 개가 크게 짖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소가 움직일 때, 목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어보았는가? 왜 소의 목에 종을 달았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소의 목에는 작은 종이 달려있다. 소에게 종소리를 들려주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종소리를 들으며 소는 마음을 안정시킨다. 밤길을 갈 때 더욱 그렇다. Singing bowl 역시 마찬가지다. 그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느낀다. 하지만 그 소리의 용도는 단지 편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 소리를 제대로 듣는 사람은 그 소리로 새롭게 태어난다. 그 소리가 깨달..
자기(自我)를 알고, 세상의 무상(無常)함과 삶이 고통(苦痛)으로 전철되었음을 깨우쳐, 세상과의 일체의 관계를 끊어낸 징표가 출가(出家)이다. 하지만 출가자의 대부분이 아직 깨달음 전이고, 사상(四相)에서 벗어나지 못한 연고로, 종교(불교)란 이름으로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겨난다. 그런 사람들은 출가(出家)한 것이 아니라, 단지 가출(家出)했을 뿐이다. 수행자(修行者)가 돈을 밝히고 세력 얻는 것에 힘을 쏟는다면, 그런 사람은 수행자라 할 수가 없다. 수행자는 모름지기 깨달음에만 심혈을 기울이고, 세상일에는 거의 간섭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당신의 주인(主人)은 누구인가? 주인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에 따라 자기 인생이 바뀌어 버리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이란 것이 있다. 미신(迷信)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체(主體)가 되는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하라는 바람직한 사상체계다.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폐단이 난무하고 있지만 말이다. 사실상 주체사상처럼 좋은 건 없다. 그것은 곧 깨달음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깨닫기 어려운 이유는 무언가에 의지하려는 우리 안의 속성 때문이다. 그것은 주체가 무언지를 알려 하지 않게 만든다. 그것이 왕왕 믿음의 대상을 주체로 치켜올리는데, 그 대상은 예수가 되고, 부처가 되고, 단군이 되고 사회주의, 자본주의도 되고 김일성, 윤석열도 된다. 주체가 그런 것들을 주체로 치환(置換)시켜 버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겨라. 나이 들수록 자신과 마주할 기회가 더 필요하다. 혼자 있다 보면 자기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고, 자기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할 수가 있다. 수행자(修行者)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동안 못했다면 이제부터라도 자신에 대해 더욱 관심을 기울이자. 깨달음은 자기를 마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보통 60세 이상이 되면 아이들도 거의 독립하게 된다. 노파심에서 간섭하게 되면 요즘 아이들은 귀찮아한다. 금실 좋은 부부라 할지라도 더러는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따로 살면 상대의 가치가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가치관이 달라 사사건건 다투는 커플이라면 더욱 따로 살기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더러는 관계가 회복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독을 사랑해야 진정한 자기를 깨우칠..
나는 수행자들에게 글을 써보라고 한다. 목표 달성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것이 글쓰기이고, 자기와의 진솔한 대화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말한 것을 지키려 하는 성향이 있으며, 글은 그것을 기정사실화 한다. 우리가 계약서를 만드는 이유는 말보다 훨씬 큰 힘을 가지는 것이 글이기 때문이다. 경전을 옮겨 적는 것을 사경(寫經)이라 한다. 그것은 읽는 것의 열 배, 백 배의 신뢰 효과가 있다. 하물며 자신의 내면세계를 글로 나타낸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과 같다. 글을 쓰자. 그리고 친구(도반)들과 서로 나누자. 그것보다 더 큰 보시는 세상에 드물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처럼 답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철학자들 역시 직답을 피할 것이다. 기독교는 오직 조물주(神)에 대한 찬양이라 말할 것이고, 불교는 영원한 소멸(Nibvana)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우리가 만족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우리는 이미 삶의 목적지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이미 서울에 도착해 있는 사람에게 왜 당신은 서울에 왔는가를 묻는 것과 같다. 물으려면 "이것으로 당신은 만족하는가?" 아니면, "다시 길을 떠날 것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리 묻는다면 사람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올 것이다. 혹자는 "피곤하다, 쉬고 싶다"고 할지 모르고, 혹자는 "나를 여기에 오게 한 궁극적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