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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나'는 물과 같다. 고정되지는 않았어도 존재한다. 고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없다'라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낀다. 고정되지는 않았어도, 보고, 듣고, 느끼는 자는 있다. 그릇이 없이 물을 담을 수는 없다. 깨달을 것은 없다고? 그럼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존재한다. 내가 없다면 무엇을 깨닫는단 말인가? 나는 물처럼 고정되지는 않았어도 엄연히 존재한다. 봄이 있음은 보는 자가 있는 것이요, 들음이 있음은 듣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배가 지나간 자리, 비행기 지나간 흔적이 있다는 것은 배와 비행기가 있다는 것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나'는 물처럼 모양은 없어도, 엄연히 있다.
지식인(교수)은 쉬운 이야기를 어렵게 말하고, 지혜자(성인)는 어려운 내용도 상대의 눈높이를 따라 쉽게 말한다. 깨달음이 어려운 이유는 쉬운 이야기를 복잡하고 어렵게 말하기 때문이다. 쉬운 이야기는 쉽게 듣고, 어려운 이야기도 쉽게 정리해 듣는 습관을 들이라. 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일이 왜 그리 어려운가? 쉬운 것을 스스로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깨달음도 버려라."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이 한 말이다. 하지만 그는 깨달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왜냐면 깨달음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버릴 것 역시 없기 때문이다. 편의상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들은 하나, 사실은 얻고 말고 할 것이 없는 것이 깨달음이다. 우리는 본래부터 깨달아 있으므로 다시 깨달을 수는 없다. 이미 부처인데 어찌 다시 부처가 된단 말인가? 단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내려놓기만 하면 된다. 쓸데없는 의미 부여 하지 말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보기만 하면, 그것이 깨달음이다. 빛이면 빛이고, 소리면 소리고, 느낌이면 느낄 뿐이다. 그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데, 무슨 버릴 것이 따로 있단 말인가?
실존주의(實存主義)란, '나'다운 나'를 만나는 시도이다. '나'다운 나'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공(時空)에 구애받지 않는 '무엇'이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낸 것을 가리켜 "깨달음"이라 한다. 그것을 찾기 위해선 본래 모습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은 내가 아닌 것들을 과감히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를테면 임시로 사용하고 있는 것, 몸과 마음 그리고 신앙 등등등... 부정이 무르익을 때, 오롯한 '나'다운 '내'가 출현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각(自覺)과 결단을 통해 '실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선 실천을 빼놓을 수 없다. 실존(實存)이란 실제로 존재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지 않으며, 고통(Suffering) 또한 없다. 무아를 실존이라 주장하는 것은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서? 돈 벌고 권력을 얻기 위해서? 하지만 그것은 삶의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 당신에게 심어놓으려 했던 것이다. 왜 사느냐 묻지 말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역사 이래 왜 살아야 하는지 알아낸 사람은 없다. 왜냐면 삶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무엇을 목적으로도 살 수 있다. 판검사나 의사가 목적일 수 있다. 사업가, 정치가가 될 수도 있다. 그 선택권은 언제나 당신에게 있다. 하지만 불혹(不惑)을 지나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되었건만, 제대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우선 자기 자신에는 관심조차 없었고,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살기 분주했기 때문이다. 삶의 순..
알아챔 민정암과 함께하는 仙道(TCR) 특별 과정 TCR은 선도에너지 교실(Tao-energy ClassRoom)의 약자이며, 민정암 TCR은 민정암 공부 50년의 결실입니다. 민정암 선생의 내공(內功)이 실현(實現)되는 당신과의 일대일(1:1) 특별 장소로서, 기초 수련 후 당신은 매일(everyday) 원격(remote-control)으로 막힌 氣를 열고, 부족한 氣를 보충받게 됩니다. 참석은 선도연맹 회원에게만 허락되며(가입 필수), 외기방사(外氣放射)와 기침(氣針)이 시술됩니다. 내면(內面) 세계가 변하지 않고 현실(現實) 세계가 변할 수는 없습니다. 건강 문제가 있거나, 축기(蓄氣)가 필요한 사람(小周天 준비), 그리고 오염된 에너지, 즉 부정적인 기운(濁氣)의 빙의(憑依)로 운(運)이 자주 막..
남들이 갖지 못한 것, 나만의 소유가 있는 사람은 느긋하다. 값비싼 명품(名品)을 가진 사람이 느끼는 그것처럼 말이다. 누구도 부러워하는 미모(美貌)의 부인을 둔 사람이거나, 남다른 능력(돈과 권력)의 남편을 둔 사람, 그 둘은 한동안은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런 사람들은 조바심치지 않는다. 자존감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절륜의 정력을 가진 남자, 소위 명기(名器)를 지닌 여성도 마찬가지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는 매력이 가치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유한(有限)하다. 조만간 시들어 버릴 것들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돈이 없어도, 집도 절도 없어도, 당당하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 썩지 않을 보물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깨달음이 있다 할지라도 기력(氣力)이 없..
말처럼 허망한 것도 없습니다. 말로는 떡을 해서 천하 사람을 다 먹일 수 있습니다. 말로는 "내가 없다"고 할 수 있으며, 그리 믿으며 살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내가 없다고 느끼거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탓하기는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그리하겠습니까?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합니다. 무아(無我)의 주장은 실제로 자기가 없어진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나는 그런 사람을 칠십 평생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그리 말했다고 맥없이 따라 해선 곤란합니다. 그 논리(論理)는 허구(虛構)입니다. 마치 마약(痲藥)과 같습니다. 어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지구에 발붙이고 사는 한 말입니다. 정말 내가 없다면, 무슨 짓을 해도 ..
가장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왜 사는가?",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합니다. 대답이 어려운 이유는 사는 목적은 바로 삶 자체이기 때문이고, 나는 바로 여기 "이것"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게 간단한 것을... 물론, 이 몸과 이 마음이 나는 아니지요. 그것들은 나의 것, 나의 소유물로서 나의 조종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지를 알면 "왜 사느냐?" 문제는 간단히 해결됩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내 몸, 내 마음(受想行識)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남는 것.. 그것이 바로 나 아닌가요?
우리는 에너지 속에서 삽니다. 에너지는 생긴 적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지만, 모든 일을 합니다. 그것은 빛을 주고, 열(熱)을 주고,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밥을 먹을 수도 없고, 잠을 잘 수도, 사랑도 안 되고, 심지어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선(善)하지도 악(惡)하지도 않지만, 모든 작용의 주체(主體)가 되고 깨달음으로도 인도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는 이유는 그것이 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에너지를 우리말로 '기(氣)'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