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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외단공이 효과적이려면 동료(道伴)들과 호흡을 맞춰야 한다. 단전(丹田)의 활성화는 혼자 애를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몇몇이 함께 닦는 분위기 속에 들어가야 수월하다. 특히 소주천(小周天)은 필히 스승과의 에너지 동조(同調)가 필요하다. 스승이 없이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다. 그를 신뢰해야 한다. 불씨가 단전에 머물 때까지 늘 그와 함께여야 한다. 정신적으로 늘 한통속이어야 한다. 기운이 완전히 자리를 잡을 때까지 스승과 멀어져서는 안 된다. 스승과의 인연은 헛도수를 진주천(眞周天)으로 바꾸니 말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하지만 모든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본능(本能)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자기를 이기는 힘,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독특한 가치다. 정치나 기업에 투신하는 사람이 국민과 노동자를 생각지 않고 자기 사리사욕만 추구한다면 그 런 사람은 모리배에 불과하다. 소주천(小周天)을 꿈꾸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기법(技法)보다는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내가 소주천을 원하는 이유에 대해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보라. 그 대답이 명확하다면 그의 소주천 공기(工期)는 반으로 축소될 수 있을 것이다. 늘 자기를 살펴라. 타인의 시선에 좌지우지되지 말라. 대답은 모두 거기에 있다.
귀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죽은 신(神)은 작용력이 없어, 젯상을 차려내도 먹지 못하고 단지 향음(鄕飮)만 할 뿐이다. 엔진과 밧데리가 없는 것을 자동차라 하기 어렵듯이, 사람(精氣神)이 죽어 정(精)과 기(氣)를 잃으면 사람이라 하지 않고 귀신(神)이라 한다. 하지만 무시해도 상관은 없는 존재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선도(仙道) 수행은 비록 몸과 숨을 잃게 되더라도 神이 氣를 잃지 않아 작용력이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함이다. 믿든지 말든지, 그런 존재를 가리켜 신선(神仙)이라 한다.
힘을 빼고 고요히 움직여라. 기운(氣運)이 일어날 것이다. 가늘고 길게 숨을 쉬어라. 기운이 모일 것이다. 의식을 모아 기운을 하복(下腹)의 중앙 단전으로 보내라.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단전(丹田)이 열리고 말 것이다. 그것이 단전호흡이다. 기운을 모으고 의식과 호흡을 계합해 삶고 찌라. 그것이 양신(養神)이다.
소주천 요결 1. 스승(소주천을 이룬)을 만나야 한다. 2.소주천(小周天)에 대한 이해와 열망 3. 단전(丹田)이 실해져야 한다. 4. 스승에 대한 절대적 신뢰 5. 스승과의 氣 공유 ● 책이나 영상물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도반(道伴)과 함께 라면 도움이 크다. ○ 확고부동한 이해와 변치 않는 열망 ● 외단공(外丹功)은 필수적이다. 세상에 에너지 없이 되는 일은 없다. ○ 자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아니면 의념주천에 그치고 만다. ● 의심이 생기면 氣가 그친다. ○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한다. 氣가 쇄(衰)하면 어렵다. ● 소주천은 선도의 알파와 오메가, 꽃과 열매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처럼 답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철학자들 역시 직답을 피할 것이다. 기독교는 오직 조물주(神)에 대한 찬양이라 말할 것이고, 불교는 영원한 소멸(Nibvana)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우리가 만족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우리는 이미 삶의 목적지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이미 서울에 도착해 있는 사람에게 왜 당신은 서울에 왔는가를 묻는 것과 같다. 물으려면 "이것으로 당신은 만족하는가?" 아니면, "다시 길을 떠날 것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리 묻는다면 사람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올 것이다. 혹자는 "피곤하다, 쉬고 싶다"고 할지 모르고, 혹자는 "나를 여기에 오게 한 궁극적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선..
소주천(小周天)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은 불(火)이다.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며, 그중 제일은 성욕(性欲)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발기(發起)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발기는 발기(發氣)며 그것을 일으키는 것은 불(열정)이다. (여성도 마찬가지) 재처럼 마음속 욕망의 뿌리까지 식어버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여동빈은 말하기를, 70세가 넘어도 마음만 있다면 선도(仙道) 공부가 가능하다 하였지만, 그 말은 불씨가 살아있을 경우를 말한 것이다. 수화기제(水火旣濟)는 물 밑에 불이 자리 잡은 것으로 길(吉)하다 하였다. 기(氣)는 단전(丹田)에 머물며 불기운을 보존한다. 그리고 에너지 새어나감이 다한 것을 누진통(漏盡通)이라 한다. 스승의 지도에 따라 자기 안의 불을 찾아내 잘 길러내야 한다. 그..
움직임(동작)과 호흡을 연결해 보라. 호흡에 의식을 두어 보라. 에너지(氣) 흐름을 느낄 것이고, 점점 실(實)해지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선도(仙道)가 차별화되는 것은 그 중심에 에너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선도를 닦으면 에너지를 느끼게 되고, 운영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컨티션을 좋게 하고, 심신을 안정시킨다.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지 않다. 존재계 모두가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기 에너지를 다스리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 단순히 아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깨달음을 얻었다 할지라도 에너지 장악이 부족하면 아직 편안함을 얻었다 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명예는 있어도 땟거리가 부족한 것과 같다. 그리되면 비록 존재는 깨우쳤다 할지라도 에너지를 주재(主宰)할 수 없어 삶에 닥치는 불편함은 여전하다. 性(理)과 命(氣)은 서로를 도와 존재를 완성하게 되어있다. 아무리 밝게 리(理)의 세계를 깨우쳤다 할지라도 기(氣)가 받쳐주지 못하면 스스로 밝을 수 없으며, 에너지가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理가 밝지 못하면 제힘을 발휘할 수 없다. 깨달음을 얻었으면 氣의 운영을 공부하는 것이 순서이며, 축기(蓄氣)와 운기(運氣)가 되었다면 반드시 밝은 깨우침이 수반되어야 한다. 성(性)과 명(命)은 균형을 잃으면 안 된다. 어느 한쪽이 기울면 나머지 한쪽마저 흔들리기 때문이다...
수행을 위해서는 일단 잡념의 통제가 필요하며, 수행자는 인연 따라 각기 자기 기국(器局)에 맞는 것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특정한 어휘(呪文과 챈팅)를 외운다거나, 일정한 동작(3000배, 수피댄스)을 반복, 그리고 호흡의 관(觀), 간화선(看話禪) 등 명상이라 불리는 여러 가지 것들이다. 그중 어떤 것도 순수의식(Samadhi)으로 연결되는 다리 역할을 한다. 인간의 일체의 행위는 남김없이 깨달음으로 연결되어 있다. 물론 수행의 의지가 있는 사람에 한하겠지만, 하늘의 섭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해인총림의 조실(祖室), 성철스님은 화두(話頭)가 여여(如如)한지에 중점을 두어, 오매일여(寤寐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를 주로 물었다고 한다. 법거량(法巨量)을 통해 가늠하는 전통을 버리고 말이다. 선도(仙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