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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命) 공부는 어떻게 성(性) 공부를 돕는가? 본문

Taiji Yoga/9.1 기운 공부: 외단공 (Outer dan)

명(命) 공부는 어떻게 성(性) 공부를 돕는가?

thedaywemet 2020. 10. 5. 08:00

명(命) 공부는 어떻게 성(性) 공부를 돕는가?

운기(運氣)로 자성(自性)을 보게 되는 이유...

자성(自性)은 누구나 이미 다 가지고 있는 것이며, 따로 무엇을 더 획득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성을 보기 위해서 "생각을 내려놓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을 하는지 안 하는지 체킹(checking)하는 것이 생각 없이는 불가능하고, 생각을 안 한다면 보았다는 것을 인지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멍 때리고 앉아 있는다거나, 혹은 티비나 게임 등에 몰두한다면 일시적으로 생각이 없어지기는 하겠지만 자각(自覺)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생각이 없는 상태로 본다는 것, 그것은 물과 기름같아서 양립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간혹, 견문각지(見聞覺知)가 뜻하지 않게 하나로 온몸에 와닿는 체험을 한다거나, 머리는 쉬는데 가슴은 울리는 경우가 생기거나, 희귀하게  온 좌절로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견성 체험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자의(自意) 반, 타의(他意) 반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불러오기(?)가 참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 자리는 추억 속의 해프닝(happening)이 아니라 언제나 여여(如如)한 것으로, 그런 상태에 이른 것을 오매불망(寤寐不忘) 혹은 확철대오(廓徹大悟)라고 합니다. 

어떤 수행법에서는 생각을 멈추고 자각하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숨을 길게 하거나 참는 방법을 씁니다. 최대한 숨의 시간을 오래 만드는 것이 해당 수행법의 목표입니다. 바로 해보면 알 수 있듯이, 숨을 참으면 생각이 진행되지 못할 수 있고 집중과 주시하기가 유리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숨을 오래 참는다는 것은 고통스럽고, 지속할 수가 없으며(혹자들은 유체이탈하여 30분 이상 지속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몸과 마음에 긴장 상태를 만들게 됩니다.   

한편, 선도(仙道)의 행법은 몸은 릴렉스(relaxation) 하고, 숨은 자연스럽기 때문에 숨을 굳이 길게 하거나 멈출 이유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의수단전(意守丹田)이란 숨을 참는 것이 아니라 숨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견성(見性)은 마치 아기가 제 힘으로 일어나 걸음마를 떼는 것처럼, 그 방법이 따로 있지도 않거니와,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저 자기 다리 힘을 길러 자연스럽게 걸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 이해와 납득으로는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맘대로 뛰어다니기 전까지는(무위법; 無爲法) 걸음마 연습이 몸에 배도록(자연에 순행하는 유위법; 有爲法) 해야 합니다.

자성(自性) 자리를 찾는 것은 무문(無門)이며, 지도무난(至道無難)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그 자리를 찾은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지, 옆길로 새는 일이 너무나 허다하므로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 혹은 금강권(金剛圈) 율극봉(栗棘蓬)이란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자신을 내 맡길 수 있고 정법(正法)으로 자신을 이끌어줄 수 있는 스승을 찾습니다.

그것 역시 아무에게나 기회가 오는 것은 아니어서 인연이 없으면 어렵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초심자가 실패하는 이유는 그것을 에고(ego)의 힘, 에고의 노력으로 이루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에고 외의 다른 의식을 의식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의 에고가 한 발 물러나면 생각 없이 볼 수 있습니다. 에고가 생각의 핸들을 꽉 잡고 있고 절대 놔주지 않는다면 생각 없이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에고가 핸들을 내놓고 조수석에 가만히 앉은 상태, 즉 에고가 릴렉스 된 상태에서야 생각 없이 볼 수 있는데, 선도(仙道)의 기운(氣運) 공부가 이것을 훈련하는 매우 훌륭한 방법입니다. 즉, 선도에서의 명(命) 공부가 견성(見性)을 위한 구체적인 다리를 놓는 공부법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에고가 물러나면 그 자리에 드러나는 조용한 의식(意識)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의식은 단지 보고, 느끼고, 관찰하는 것 밖에는 할 줄 모릅니다. 하지만 기운을 감지하고, 행기(行氣)를 하고, 운기(運氣)를 하게 되면 점점 밝아집니다.

 

특히 운기(소주천; 小周天)는 그 자리(見處)를 더욱 생생하게 만들어주는 행법이며 아울러 외단공(外丹功)은 더 큰 안정감을 주고 자신감과 위안(?)이 됩니다. 그것은 한번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에고는 생존 본능을 위해 있습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해 고분분투하는 나의 애처로운 오른팔입니다. 에고가 탐진치(貪瞋痴)에 빠지는 것도, 습(習)과 착(着)이 생기는 것도 다 나의 생존에 보탬이 되기위해 그리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고에만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그리 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안심(安心)은 점차 멀어지고 더 감정과 번뇌에 묶이게 될 것입니다.  

에고는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 매우 떨어집니다. 조용한 의식이 힘을 받게 해야 합니다. 그리되면 에고는 안심하고 고분고분 운전석을 내줍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필요할 때 에고는 다시 운전석에 앉으니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그 자리가 여여(如如)해질수록, 에고와 심층 의식은 한 몸이 되어갈 것입니다. 원래 한 몸인데 얼굴만 두 개인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조용한 의식이 드러나는 것은 각자가 다른 느낌이겠지만 스스로는 인지(認知)가 가능합니다. 외단공(外丹功)을 하면서  호흡과 동작, 마음이 서로 동조하다가 합쳐지면서 어디론가 들어가는(?) 듯한 경험을 해보셨다면 아마 어느 정도 고요함에 대한 이해가 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대단한(?) 체험도 아니며 무난하고 편안한 느낌입니다.

성(性) 공부는 에고가 조용할 때 이루어집니다. 에고가 조용해지면 생각(말)이 쉬어지고, 관심이 외부 자극(객체)에서 내부 주체(나)로 쏠리기 때문입니다. 명(命) 공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조용한 에고의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기운이 살아나고 컨트롤(運氣)이 용이해집니다. 

선도(仙道) 수련법은 에고를 물러나게 하는 수련입니다. 고요한 숨과 함께  몸을 움직이는 것은 에고를 한 발 비켜서게 만듭니다. 그것은 심력(心力)을 강하게 하고, 바라던 것을 보게 합니다.

 

혹 견성에 전혀 관심이 없으신 분이라면 소주천을 이루었어도 견성에는 별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비밀로 하지 않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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