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7. 구원: 자력-타력, 종교-신앙 (Salvation) (37)
谷神不死
아는 사람은 믿지 않는다. 그냥 알 뿐이다. 믿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저 믿을 뿐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그들은 눈을 감고 있으면서 눈뜬 사람보다 더 선명히 본다고 착각하고 산다. 믿음은 도박이다. 처음엔 약간 이익을 보는 듯해도, 결국엔 전 재산과 목숨까지 잃어야 끝난다. 믿음처럼 어리석은 것도 없다. "그것"을 직접 보고, 듣고,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치 꿈속 궁전에서 사는 것과 같다.
믿음이 진리(眞理)인가? 그렇다면 믿음을 가진 사람들끼리 왜 싸우는가? 같은 조상을 가진 이슬람과 유대인들은 왜 서로 죽이는가? 같은 하느님(Yahweh)을 섬기는 기독교인들끼리는 왜 서로 이단이라고 헐뜯는가? 예수가 말하기를, '진리를 알면 자유와 사랑이 생긴다'고 했는데, 믿음은 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래도 나는 내 믿음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한다면 더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음을 지켰던 사람들의 결말이 어떠했는지 알고 있다. 아마 당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참혹하게 처형당했거나, 아니면 바람처럼 흙이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믿음은 옷이나 자동차와 같다. 오늘은 이 옷, 내일은 저 옷을 입듯, 어제까지 무속인이었던 사람이 오늘은 개신교, 내일은 가톨릭, 그다음은 불교, 그다..
요즘 지옥이란 말을 여기저기서 자주 듣습니다. 가보지 않아서 그 사람들이 무엇을 지옥이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우리는 천국에 사는 것 같습니다. 이 밥에, 고깃국을 넘어, 왕들이 먹던 음식을 먹고 살며, 황제가 입던 옷을 입고, 여름에도 시원하고, 겨울에도 춥지 않은 집에 살고 있고, 말이 끌지 않는 마차를 타고 다니며, 지구 반대편 일을 눈으로 확인하고, 물길, 하늘길을 맘대로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것을 지옥이라 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당신의 자유이니 말입니다.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을 과학(科學)이라 한다. 고로 보편적이지 않은 주관적인 것, 체계적이지 않은 것에 과학이란 이름을 끌어 써서는 안 된다. 특히 신앙이란 전적으로 주관적이므로 그것에 과학을 대입한다는 것은 사려 깊지 않은 태도이다. 오늘날 일부 성직자들이 자신의 信仰에 과학의 옷을 입히려는 태도는 과학에 대한 대중의 신뢰에 편승하려는 얄팍한 사기성이다. 신앙은 신앙대로 가치가 있다. 과학에 의존치 말고 그들대로의 길을 가야 한다. 과학으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태도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자인(自認)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혜에 기초하여 과학은 과학대로의 길을, 신앙은 신앙대로의 길을 가면 된다. 그리하노라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만나게 될 것이다.
자기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神에게 숭배(崇拜)를 바칩니다. 자기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神 앞에 엎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조차 믿지 못하는 사람의 믿음을 神인들 달가워하실까요? 자기를 아는 사람은 神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자기 속에서 늘 神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는 늘 神에게 즐거움과 감사함을 전하며 삽니다. 그런 사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믿음처럼 고귀한 것도 없지만, 믿음처럼 허망한 것도 없습니다. 믿음처럼 훈훈한 것도 없지만, 믿음처럼 당혹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아는 사람은 믿지 않습니다. 그저 알고 있을 뿐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모른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은 자기에서 그쳐야 합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을 남들도 모두 믿게 하려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하면 믿음이 폭력으로 변하고, 결국은 살상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고귀한 믿음이 쓰레기가 되고 맙니다.
믿음은 편안한 것입니다. 믿음은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간절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구걸하듯 매달리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조바심내지 않습니다. 소리 지르며 울부짖지 않습니다. 투쟁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느긋하게 기다립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정해진 시간(定時)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굳이 믿는다고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믿음은 대체로 삶을 긍정적이 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믿음은 삶의 목적을 알게 해주고, 그것은 기쁨과 감사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더욱 대단한 것은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까지 해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실수하고 있는 것은 무언가를 믿기에 앞서 믿는 주체, 즉 자기 자신에 대한 파악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과 "믿는 자" 간에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기에 앞서 그 둘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선결되어야 한다. 둘 중에 하나가 부실하면 나머지도 당연히 부실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살펴야 하는 것은 당연히 '믿는 자'여야 한다. 왜냐하면 신(神), 도(道), 자연(自然) 등의 믿음의 대상은 자신에 대해 무지..
삶이란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갈등합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교차점검(cross check)입니다. 이치(理)와 현상(事)은 둘이 아닙니다만,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수용해야 할 때도 있고, 더러는 거부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무엇이 최선인가를 선택할 때, 순수의식(純粹意識)이 기초가 된다면 쉽게 해결됩니다. 현상 세계와 어울려 cross checking을 하세요. 그래도 답이 나오지 않을 때는 보류하는 것이 좋습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주자주 생각과 감정을 내려놓고, 순수의식에 머문다는 것은 최고의 선택을 위해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삼매(Samadhi)란 세상(森羅萬象)에 관심을 거두고 자기에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깨달음(自覺)이 있기 때문입니다. 책 읽기나 게임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것(독서 삼매, Game 삼매)처럼 자기에게 삼매(三昧) 할 수는 없을까요? 정혜쌍수(定慧雙修)란 말이 있습니다. 고요함에 머물면 머물수록 본질적 지혜에 밝아지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공부는 내려놓는 것(三昧)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야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그것을 가리켜 心靈이 가난한 자라 했으며, 그런 사람은 천국의 주인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마태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