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7. 구원: 자력-타력, 종교-신앙 (Salvation) (37)
谷神不死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죽어서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의 인도로 천당과 지옥을 다녀왔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빛이 비치는 긴 통로를 따라갔었다고도 하고 텅 빈 빛 속에 머물렀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숨이 끊긴 후에도 어느 정도는 뇌(腦) 활동이 진행된다고 의사들은 말합니다. 무아(無我)를 주장하면서도 사후세계를 체험하는 그놈은 과연 누구일까요? 나 역시 세 번을 죽어(?) 봤습니다. 한번은 장티푸스로 사경(死境)을 헤매던 중이었습니다. 한 달을 먹지 못하고 피똥만 연일 싸서 기진맥진할 때였습니다. 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한 그날 밤이었습니다. 내가 저절로 천장 위로 날아올랐습니다. 피골(皮骨)만 남아 누워있는 침대 앞에 어머니가 엎으려 울고 있었고, 돌아서 멀거니 창밖을 바라보며..
구원(救援)에 대한 해석은 종파별로 다르나,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는 해석이 가장 무난하다. 구원은 타력(他力)에 의한 것과 자력(自力)에 의한 것 두 가지가 있다. 타력에 의한 구원은 신앙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신앙은 무조건적, 절대적이어야 한다. 우선 스스로가 죄인임을 믿어야 하며, 죄 사함을 해주신 대속주를 믿어야 한다. 조물주를 믿어야 하고, 그의 사랑과 그가 마련한 계획들을 의심치 말고 믿어야 한다. 반면에 자력의 구원은 매우 간단하다. 자신의 정체성만을 확인(見性)하면 된다. 그것뿐이다. 자각(自覺)을 이루는 순간, 고통과 죽음에 대한 의문이 저절로 풀린다. 그리고 그것은 당사자가 이미 구원받았음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이 타력의 신앙을 통해 구원받았음을 간증한다. 그러나..
깨우침을 얻으면(開眼) 이론으로만 알고 있던 '무상(無常)'이 실감 납니다. 저절로 탐내는 마음(貪心)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이해하게 됩니다. 당연히 성내는 마음(瞋心)이 힘을 잃습니다. 어리석음(癡心)에서 벗어나 경전(經典)이나 선지식(善知識)의 글이 이해되고, 화두(話頭)가 가슴에 와닿습니다. 무위자연(無爲自然)한 자성(自性)을 그들이 무아(無我)라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고,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근심 걱정이 사라져(無苦) 명실상부한 안식(安息)을 누리게 됩니다. 죽어서 간다는 극락과 천국이 지금 바로 펼쳐집니다. 그것이 견성(見性)입니다. 그 후부터는 "이것 때문에 살았었구나!"를 절실히 느끼며 살게 됩니다.
"이것은 내 신앙(信仰)이며, 종교(宗敎)입니다"라는 말로 진리로부터 피하는 사람이 배운 사람 중에도 너무 많습니다. 진리(眞理)를 추구하는 것만을 가리켜 宗敎(꼭대기 가르침)라 할 수 있습니다. 대상(對象)을 믿고 그것에 경배하는 신앙 형태를 종교라 할 수는 없습니다. 대상(對象)은 바뀔 수밖에 없게 마련이고, 眞理는 바뀌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宗敎라는 이름을 표방한 신앙 단체들은 말로는 우상(偶像)을 터부시하면서도 우상을 신앙 형태로 하는 신앙 단체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들이 그 상징물들을 가리켜 우상이라 하든 아니라고 주장하든 말입니다. 삼독(三毒: 貪嗔癡)에 찌들어 있는 대중은 우상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모이게 하려면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상이 필요할지 모릅니..
우리의 삶은 믿음으로 시작해 믿음으로 끝난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는 싹이 터서 잘 자라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고, 바람이 심해도 웬만큼 불다 말 것이라는, 억수 같은 비도 며칠을 못 넘길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낼 때는 바르게 가르쳐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고, 딸을 사위에게 맡길 때는 아끼고 사랑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하지만 '신앙(信仰)'은 다르다. 믿음과 신앙은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믿음은 상대적이지만, 신앙은 절대적이다. 신앙은 믿음과는 근본부터 다른 아주 위험한 것이다. 신앙은 분별력을 마비시켜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든다. 겉으론 미소를 보이지만 자기가 믿는 것 외엔 모두 거부하게 만드는 아주 독선적인 것이다. 나중에 그것들이 모두 위선(僞善)이며 사기로 밝혀진다고 할지라도..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Matthew 3:2)"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여기서 '회개하라'라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를 먼저 그리스어로 번역하고, 이것을 영어로 옮긴 뒤 다시 한국어로 옮긴 것입니다. 성경에서 '회개(repentance)'라 번역되는 그리스어 μετάνοια(영어로 음역하면 metanoia, 메타노이아)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어 '메타(meta)'는 '~ 이후의', '~를 넘어선'이라는 뜻이고, '노이아(noia)'의 어원인 'nous'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즉, '메타노이아'는 '마음을 넘어서다', '기존 생각의 틀을 바꾼다'는 의미, 그리고 더불어 회개, 후회, 반조(返照), 개혁의 뜻을 내포하고 있습..
깨달음은 불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만약 그리 주장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깨달음은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많이 배운 자나 무식한 자나,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인들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하느님은 공평치 못한 존재이며, 인류의 조상을 하느님이 창조했다는 말도 모두 거짓입니다. 예수를 믿든, 부처에게 절을 하든, 누구에게나 생명(마음)이 있습니다. 깨달음과 구원 이전에 존재의 중심자리가 무엇인지부터 파악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마음(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얻든, 구원을 받든, 그 생명 자리를 모른다면, 구원이든 깨달음이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신앙(信仰)과 종교(宗敎)를 혼동(混同)하여서는 안 된다. 종교와 신앙의 혼동에서부터 인간사의 모든 불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종교와 신앙은 다르다. 신앙은 믿어(信) 우러르는(仰) 것이며, 종교는 최상(宗)의 가르침(敎)이다. 우리는 무엇이든 신앙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것이나 종교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나무나 개, 고양이, 소를 신앙할 수 있다. 형상물(形象物)이나 가상(假想)의 것을 만들어서도 신앙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는 신앙이 아니다. 그러한 모든 것을 초월한 절대적 가르침이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서로 자기들의 가르침을 종교라고 주장한다. 최고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우러러 받들어 믿으면(信仰) 이미 종교는 아니다. 종교는 마땅히 하느님, 부처님..
독재자는 종교인을 피하고 싶습니다. 정치인은 신앙인을 좋아합니다. 종교인은 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사람이고, 신앙인은 자기가 누군지에 대해 누군가로부터 배운 사람입니다. 종교인은 두려움이 없어서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시키는 대로 말을 듣습니다. 독재와 종교는 양립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밑거름으로 하여 자라나는 것이 독재입니다.
정치권의 갈등에 대해 대학생들이 "우리는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느냐?"는 플래카드를 만들어 들고 거리로 나섰답니다. 왜 누군가를 믿고 살아야 합니까? 그리고 솔직히, 누군가를 믿고 살아 본 적은 있습니까? 바보 아닙니까? 왜 누구를 믿고 삽니까? 그동안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면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정말 누굴 믿고 살았었습니까? 왜 자기를 믿고는 살지 못합니까? 왜 자기를 살피고 단속하면서는 살지 못합니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을 왜 자신에게는 적용하며 살지 못합니까? 꼰대들하고는 무언가 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꼰대들을 비난하면서 그들이 하는 그대로 따라 합니까? 그것도 그들 책임입니까? 이제는 변해야 합니다. 먼저 내가 누군지 나의 정체성부터 알아내야 합니다.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