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바라봄

아! 변선환

알아챔 2024. 6. 18. 09:14

1991년 감신대 변선환 학장은 목사직에서 면직됐다.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며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영국 국교회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파문당한 뒤 ‘교회가 아니라 세계가 나의 교구’라고 선언했던 감리회 창시자 존 웨슬리(1703~1791)가 세상을 뜬 지 200년 만이었다.

 

다음 해인 92년 5월 7일 서울 중랑구 망우동 금란교회에서 ‘종교 재판’이 열렸다. 재판정은 김홍도 목사가 이끄는 금란교회 신자 3,000여 명의 찬송과 기도 소리로 가득했다. 스승을 구하려는 감신대 대학원생들의 절규 어린 함성은 수천 군중의 함성에 묻혀버렸고, 수십 명의 대학원생들은 곧 억센 남성 신도들에게 예배당 밖으로 끌려 나갔다. 감리회 재판위원회는 변선환에게 감리교회법상 최고형인 출교 처분을 내렸다. 감리교회 목사직을 파면하는 것은 물론 신자 자격까지 박탈한 것이었다.

 

종교재판 받고 목사 자격 박탈

 

변선환은 서울 정동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위해 단상에 올라 “나는 죽지만, 내 제자들은 노다지”라고 했다. 그가 내 제자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경고하는 의미에서 ‘노 터치’(손대지 마라)의 어원인 ‘노다지’라고 했지만, 말 그대로 그의 제자들은 그로 인해 세상에 빛을 나눠주는 노다지가 되었다.

 

그는 서구신학의 틀대로 만들어진 모조품을 찍어내는 스승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수천수만 년 동안 이 땅의 자연 속에서 잉태돼 온 광맥을 찾게 해준 능숙한 사부였다. 비록 변선환 자신은 오직 책 속에만 묻혀 산 학자였지만, 그로 인해 이현주 목사, 최완택 목사, 2년 전 타계한 채희동 목사 등 동양적 영성의 우물을 길러내는 영성가들이 나왔고, 한국기독교청년회(YMCA) 환경위원장 이정배 감신대 교수, 연세대 교목실장 한인철 교수,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 수원 등불교회 장병용 목사, 홍천 동면교회 박순웅 목사, 기독교 환경연대 양재성 사무총장 등 한국교회의 ‘희망’들이 탄생했다.

 

변선환은 평안도의 항구 진남포에서 태어나 유가적 가풍에서 자랐다. 해방 후 그를 기독교로 인도한 것은 3·1운동 민족 대표의 한 명인 신석구 목사였다. 신석구는 처음엔 3·1운동 가담을 주저한 인물이었다. 외국 선교사들이 다른 종교인들과는 어울리지도 말고, ‘정치적 일’엔 관여치 말라고 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홀로 기도하던 중 응답을 얻은 뒤 가장 늦게 참여를 결정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6명의 기독교인 민족 대표 가운데 마지막까지 지조가 꺾이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그 신석구가 변선환의 첫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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