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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왜 사느냐?'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다. 자기가 "살아가는 제일의 가치"에 대한 질문이지만 대부분 사람은 이것 밝히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혹자는 자신의 가치가 현 체제와 맞지 않아 그것을 말하면 혹시라도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꺼린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은 분명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으로 분류해도 될 것이다. 자기 가치관(價値觀)이 없이 남이 하는 대로 그냥 따라 사는 경우가 문제라면 문제다. 자기 가치관이 뚜렷지 못한 사람은 타인에 대한 이해도 빈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기 의견은 내지 않고 그냥 비판 없이 남의 말을 따라 살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다음에 있다.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상황이 전개되고 나면 이러쿵저러쿵 뒷말한다는 것이다. 깨어있는 삶이란 뚜렷한 자신만의 가치관..
지혜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가치관에 대한 타인의 합리적 비판에 감사한다. 그것을 통해 내 생각의 오류를 바로잡고,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가치관을 표현하지 않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비판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발전할 수가 없다. 자기 속에 갇혀 我相만을 지키기에 급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자기보다 한 수 높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자기의 가치관을 내놓고 비판을 구해야 한다.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보다 더 큰 행운은 없다. 대부분 사람은 충고하기를 꺼린다. 괜한 말로 그 사람과 척을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문을 열어야 상대도 문을 여는 법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히 자기의 문부터 여는 태도,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정 ..
"나는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을 한 적이 없다." "양심에 걸려서 거짓말을 못 하겠다." "나는 양심상 그를 죽일 수 없어." "그것은 개인의 양심문제야." "그것이 그의 양심이라면 나는 비양심이란 말인가?" "양심적으로 살아!" 이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의 양심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국어사전은 良心을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말과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적 의식'이라 정의합니다. 자기를 중심에 두고 있군요. 맞습니다. 양심은 거의가 개인적입니다. 검사는 검사의 양심이 있고, 변호사는 변호사의 양심이 있습니다. 집단적 양심이라 할지라도 개인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忠孝사상이나 信仰, 그리고 도덕적 윤리가 양심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모든 것이 우리가 소속..
한국에는 "양심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良心을 四端에 근거한 仁義禮知信이라 주장한다. 요사이 한국 정부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대체 복무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그는 반대한다. (참고로 필자와 필자의 아들은 병역을 마쳤다) 탁마(琢磨)의 뜻에서 그에게 몇 가지 묻고 싶다. 오해하지 말 것은 그를 결코 비양심이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1. 그에게 과연 仁은 무엇인가? 어찌 되었든.. 신앙적 가치관 문제로 70년 이상 전과자를 면치 못하다가, 국제적인 추세에 의해 간신히 병역복무 기간의 1.5배~2배를 일반인이 기피하는 곳에서 대체 근무하게 된 사람들에게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생기는지 묻는다. 폼나게 군인이 되는 것이 훨씬 나을 텐데 말이다. 자원하여 軍에 가는 사람과 병역특례는 어찌 설..
어찌하다 一食을 하다 보니 正午쯤 식사를 비교적 갖추어 먹는 편입니다만, 과거엔 점심(點心)이라 하여 약식(略式)으로 식사를 했었지요. 떡 파는 노파가 德山에게 말하길, 내 물음에 답을 하면 떡을 거저 주고, 답하지 못하면 떡을 팔지 않겠노라 하며 經에 이르길, "지나간 마음은 얻을 수 없고, 지금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앞으로 생길 마음도 역시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現在心不可得未來心不可得)"라 했는데, 그대는 어느 마음에 점을 찍겠소?"라 물었다 한다. 그 물음에 답을 못한 德山은 점심을 걸렀다는데... 그 물음은 金剛經에 나와 있는 글이었고, 덕산은 금강경의 대가였답니다. ㅎㅎㅎ 자,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오늘 점심은 어느 마음에 찍겠습니까?
운명의 神은 움켜잡을 뒷머리가 없다고 합니다. 지나가 버린 시간은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후손 한 명의 성통공완(性通功完)을 기원하는 저쪽 세상 조상신들의 기도가 그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당신에게 부여된 깨달음의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깨어나십시오. 지금 당신은 꿈을 꾸고 있습니다. 당신이 없으면 세상도 하느님도 없습니다.
그는 오늘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 나와 남 모두에게 이로운 선택을 하는 것이 양심"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존경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그는 "그럼 군대 다녀온 나는 비양심적이란 말이냐"고 반문했었습니다. 오늘의 그는 훌륭합니다. 그러나 얼마 전의 그는 조금 미흡합니다. 양심에 대하여 조금 헷갈린듯합니다. 깨달은 사람도 더러는 그럴 수 있습니다. 내가 전적으로 옳다 할지라도 절대다수가 불편해하면 자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불편한 일이라도 다수가 찬성하는 일이라면 판을 깨지 말고 묵묵히 있는 것이 무난합니다. 그것이 진정 옳지 않은 일이라면 지금처럼 대법원에서 옳지 않다고 판결할 것이고, 그것이 옳은 일이라면 많은 이들이 양해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지켜보는 것이 좋습니다. ..
한 고위공직자가 국민을 개돼지로 생각한다는 소식에 우리는 분개했습니다. 그러나...그가 왜 우리를 개돼지로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는 망각한 채 움켜쥐는 것에만 정신 팔려 꿈속에 살고 있다면 어떻습니까? 눈앞에 맛있어 보이는 것에 취해 자존을 포기한 채 앉으라 하면 앉고, 서라 하면 서면서 살아간다면 그를 무엇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할까요? 역설적이지만 그는 우리를 깨우쳐주는 善知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로 인해 내가 혹시 개돼지가 아닌가 생각해볼 기회가 생겼으니 말입니다.
좋으면 좋다 하고, 싫으면 싫다 하세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으면 남들은 내가 좋아서 그러는 줄 압니다. 남의 눈치를 보지 말고, 싫은 것은 싫다 하세요. 무슨 큰일이 생겨날 듯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후부턴 내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점점 듣지 않게 되고, 내가 보기 싫은 것, 하기 싫은 일이 점점 없어집니다. 하기 싫은 일 하지 마세요. 하고 싶은 일만 해도 다 못하는 게 인생입니다. 착하다는 말 안 들으면 어떻습니까? 착해도, 착하지 않아도, 나는 나 아닌가요?